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높게 평가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채호가 한국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높게 평가를 했는데
신채호가 묘청의 난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난의 특징은 왕권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첫째, 국호·연호 등은 제정하면서 왕을 새로 옹위하지 않은 점,
둘째, 왕에게 거사 소식을 직접 전달한 점에서 서경세력과 개경세력간의 다툼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신채호는 이 난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습니다.
난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격하되면서,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즉,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왕권마저 능멸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청의 난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는데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고 합니다. < 조선사 연구초> 에서 시채호 선생은 묘청이 서경 천도를 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좀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 이라고 안타 까와 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채호는 묘청이 진취적이고 독립적이었는데 묘청이 졌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사대적이고 보수적으로 흘러왔다 평가하며 묘청이 진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즉 실패를 안타까워해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채호의 묘청 비판
1) 묘청의 서경 전역(戰役)에 대한 신채호의 평.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의 서론에서 ‘묘청의 서경 전역’을 낭 · 불(郎佛) 양가(兩家) 대 유가(儒家),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있다.
신채호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전자의 대표는 묘청이고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며,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으로써 조선의 역사가 독립적 · 진취적 기상을 잃고 사회 각 방면에서 노예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묘청의 서경 전역’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문의 내용은 사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묘청’과 ‘묘청의 서경 전역’에 대한 신채호의 평은 매우 달라진다.
신채호가 묘청을 가리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광망(狂妄)하다’라는 말이니,
즉 ‘미친 사람처럼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2) 신채호가 보는 칭제북벌론(또는 독립당)의 진정한 영수는 누구인가?
신채호는 993년(성종 12년)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맞아 대안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조정의 신하들이 낭가(郎家) 대 유가(儒家)로 나뉘었으며, 이 때부터 양자의 정치상의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때에 금(金 : 여진족)이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요구를 강요하자, 신채호는 고려 조정 내에서 강렬한 반금(反金) 의식과 함께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칭제북벌론의 영수로 신채호가 꼽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묘청도 여기에 들어있다. 다만 신채호가 칭제북벌론의 영수 가운데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는 윤언이(尹彦頤)다.
묘청이 그 두 번째이며, 정지상이 그 세 번째이다. 윤언이는 윤관(尹瓘)의 아들로 신채호는 그를 유일한 낭가의 계통으로 소개하고 있다.
3) 신채호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칭제북벌에 대한 의견은 모두 같으나 서경 천도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고 한다. 묘청과 정지상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윤언이는 이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채호는 이 중 윤언이의 의견이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서경(평양)은 북쪽 국경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적의 습격으로 쉽게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채호는 칭제북벌론과 서경천도론을 구분하고 있으며, 서경천도론과 그 주창자인 묘청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채호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습니다. 무장투쟁론자이자,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적으로 보았으며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신채호는 애국계몽기와 일제시대 초기를 거치며 영웅전을 쓰고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였습니다. 이때 초기 신채호는 영웅적 사관 혹은 자주적 민족주의 사관에 가까웠습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과거 영광을 부각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를 부각하고 조선의 사대성을 비판하고 고려의 자주외교를 긍정하였습니다. 그 중 고려가 자주적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고 조선에 이르러 사대성을 보인 역사적 변곡점을 묘청의 난 실패로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고려 건국 정신으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높게 평을 하는거같습니다.
중국에게 굽히면 안된다는 입장이기에 묘청의난을 높게 평가한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