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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5.26

우리나라에 화포의 도입은 언제 시작됬나요?

우리나라 옛 고대시대에는 활과 칼운 가지고 전쟁을 하다가 어느순간부터 화포나 소총이 도입되었는데요.

이런 화포의 도입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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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요약

    최무선은 고려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들을 제조한 발명가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나 1395년(태조 4)에 사망했다. 무관이던 그는 왜구의 노략질을 방어하기 위해 화약과 총이 절실함을 깨닫고 연구를 시작했다. 엄청난 공을 들여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고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본격 제조에 들어가 대장군·이장군·삼장군 등 총포, 화전·철령전 등 발사물, 질려포·철탄자와 로켓무기인 주화까지 총 18가지 화기를 제작했다. 1380년에 쳐들어온 왜구의 500여 척의 선박을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가 싸워 격파했다.

    *정의

    고려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들을 제조한 발명가.

    *개설

    본관은 영주(永州: 현재의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주1 · 유황 · 분탄주2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하게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이원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에 허락받아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 · 이장군(二將軍) · 삼장군(三將軍) · 육화석포(六火石砲: 완구의 일종) · 화포(火砲) · 신포(信砲) · 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 · 철령전(鐵翎箭) · 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 · 철탄자(鐵彈子) ·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 유화(流火) ·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 최해산(崔海山)과 손자 최공손(崔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무선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화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묘와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으로 염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보다 간편한 염초 제조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염초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을 수소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났고 결국 이원으로부터 염초자취법이란 화약제조법을 알아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 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 유황 10%, 목탄 15%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흑색 화약은 염초를 산화제로, 목탄을 가연제로 하고 여기에 점화촉진제인 유황으로 이를 압축 성형하는 것이다. 흑색 화약은 약 300℃로 가열하면 발화하면서 세차게 탄다. 대기 중에서 흑색 화약의 밀도가 1.5 정도일 때 발화 속도는 1∼3m/초로 매우 빠르지만 연소 속도는 10mm/초로 매우 작다. 그러나 압력이 높아지면 연소 속도는 증가한다. 흑색 화약은 예로부터 폭약 또는 추진약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현재도 연소성이 좋고 긴 화염을 일으키므로 고체 추진체의 점화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해본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조직했다.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무기 발달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무기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주화(走火),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 천산(穿山), 오룡전(五龍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 藜砲), 철탄자(鐵彈子) 등이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대장군, 이장군, 화포, 화통 등은 발사기 종류이고 화전,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은 피발사체 혹은 자체 폭발력을 지닌 로켓화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포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대장군포는 쇠탄두가 달린 나무탄인 ‘차대전’과 ‘중전’을 평사로 쏘는 포인데, 조선시대에는 이것을 ‘장군화통’이라고 했다. 대장군포는 한쪽이 막힌 둥근 통 모양의 포신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포의 내부 직경은 96.9밀리미터, 길이는 859.5mm, 중량이 62.8kg이다. 화약통에는 흑색 화약이 채워졌다 폭발하기 때문에 이 폭발력을 견딜수 있도록 몸통 벽 두께를 위치에 따라 다르게 하였는데 평균 34∼46mm이다. 외탄도 계산 결과 발사각이 45도일 때 탄의 비행거리는 1060m, 최대 고도는 270m이다.


    이 곳에서 발사하는 대전은 2.7kg의 쇠탄두가 앞에 달려 있고 그 가운데로부터 뒤쪽에 십자형으로 쇠날개가 4개 달려 있으며 쇠탄두, 날개 그리고 꼬리 부분에 쇠띠가 감겨 있었다. 형태가 로켓을 방불케 하는 대전은 목표를 한번에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다. 대장군포는 주로 적의 성루, 성문, 성벽, 배 등을 파괴하는데 사용됐다. 같은 형태의 ‘이장군포’는 다소 규모가 작은데 640m의 비행거리와 120m/초의 속도를 가졌다. 또 그보다 작은 삼장군포와 둥근 돌탄을 재었다가 곡사로 발사하며 운반에 편리하게 조립식으로 만든 육화석포(六花石砲)도 있었다. 육석화포란 동으로 만들었는데 격목통과 포신의 길이가 330.6mm로 짧기 때문에 장약된 화약이 발사 후 포신 안에서 다 타지 못하고 일부 포신 밖으로 나가면서 타는데 그 불꽃이 여섯 가지 색깔을 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총의 무게는 121.8kg으로 이동할 때는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운반하여 필요한 곳에서 간단히 조립하여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등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지리적 조건에서는 매우 위력적인 무기였다. 탄도 계산 결과에 의하면 탄의 속도는 최대 약 42m/초이며 45도 초기 경사각으로 발사할 때 최대 비행거리는 약 175m, 최대 비행 고도는 48m이다. 『고려사』에는 이 포로 수백 근의 돌탄을 쏘았다고 적혀 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 1377년 10월 최무선은 고려 조정에 끈질기게 요청을 한 끝에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됩니다. 화통도감을 맡은 최무선은 곧장 화포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만든 화기는 대장군, 이장군, 화포, 화통, 화전, 철탄자, 유화, 촉천화 등 총 18가지에 달했다고 합니다.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우리나라 화포는 처음 만들어 집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약과 화포가 고려에 언제 전래되었는 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14세기 전반 무렵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려사≫병지에는, 공민왕 5년(1356)에 銃筒을 사용하여 箭을 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고려에서는 그 때에 이미 有筒式 火器를 사용할 줄 알았다.

    -출처: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