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목사님은 어떻게 조선에서 원활한 생활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실제로 목사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까지 알현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기독교 대학교를 설립하시기도 했고요. 당시 조선의 천주교 배척과 연관지어볼때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조선에서 원활한 생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조선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조선어를 공부하고,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며, 조선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수정의 글을 읽기 몇 달 전까지 선교지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의 회고에는 1882~1883년,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사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은 학교 재학생인 알버트 울트만스에게 들었을 때만해도 다른 사람에게 조선을 위한 헌신을 권유하며 본인은 인도 선교에 필요한 의학 공부를 별도로 한 것으로 확인 됩니다. ‘조선을 위해 준비된 다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이수정의 호소문은 ‘조선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다고 합니다.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7월까지 미국 개혁교회와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로 각각 2차례 파송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지원은 재정적 지원 어려움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알려졌으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장로교회의 교단이 아니었다는 점.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을 조선 선교사로 임명·파송하는 미국 북 장로교회로 교단을 변경하고 목사 안수례를 받기 위해 교구를 이명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우면서 사역을 합니다. 1886년 5월 정동에서 고아들을 모아서 을 공부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1905년 경신 학당이 됩니다.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되고, 이 학교를 통해 김규식, 안창호 등 많은 민족지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1887년 9월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시작하여 훗날 한국 최초 장로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한국 최초 교회는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의해 시작된 황해도 소래교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