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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2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을 간 이유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을 의주까지 갔다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피난을 멀리 갈 수 밖에 없었나요?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병력과 우리나라 병력의 차이는 어느 정도 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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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유영화 전문가blue-check
    유영화 전문가23.12.02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왜란 2개월만에 6월에 의주까지 피천하였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파천을 하게된 이유는 일본군이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하자 파죽지세로 북진해 보름만에 4월 28일 믿었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입니다. 조선은 개국 이후 200년 기간의 평화 기간으로 국방에 대한 소홀, 군기 약화로 만일의 외침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왜군이 쉽게 북진할 수 있었던 것도 진관체제를 대신해서 부족한 병력을 활용한 제승방략체제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일본군의 침략 규모는 약 16만에서 최대 23만 5천여명의 규모로 추정되고, 개전 당시 조선군의 규모는 8만 4천의 규모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 20만 군사의 왜군은 부산에 상륙했고 도읍인 한양을 향해 빠르게 진군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의 침입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선조는 한양을 뒤로하고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을 떠나게 됩니다. 조선은 200여년 동안 전쟁이 없었기에 숭문천무의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조선초기 주요 진을 중심으로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대신 제승방략 체제는 많은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선조 25년(1592년)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친 신립의 전략은 대패로 이어집니다. 이에 선조는 한양을 사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피란길에 오르게 됩니다. 왕이 한양을 버리고 피란을 간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공노비와 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가 불타고 궁궐에 대한 방화도 이어집니다. 조정은 분조를 편성하여 왕은 의주로 피신했으나 광해군은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를 돌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을 독려하였습니다. 이후 명나라의 원군의 도움으로 전세는 점차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조선의 병력은 초기에는 17만명이었고 명나라는 2-3만명이었다가 후에 명나라군이 7-8만명으로 확대되어 조선군은 집으로 돌아가는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왜군들의 문화는 수도를 함락시킨다면

    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을 하여

    파죽지세로 경상도에서 우리나라의 수도

    한성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이에 따라 승전보 등이

    거의 없었기에 선조는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