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1979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미국인 50여명이 이란에 인질로 억류돼 있던 사건을 가리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라고 부르던데 이 사건의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휴양을 이유로 출국, 2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 샤푸르 바크티아르 과도 정부를 붕괴시키고 6월 신권적 지배 곧 종교가 다스리는 나라인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이란은 팔레비 왕정의 전제공포 정치에 항거한 민주주의 세력, 외세 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소위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조치에 반대하는 교조적 이슬람 세력 등 3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이란 혁명의 성격 상 호메이니를 정신적 지주로 한 이슬람 세력이 그 중 급진 강경파가 권력의 전면에 부상했고 그들은 모두 서구식 제도, 관습, 양태를 부정함으로써 이슬람 원점으로의 회귀 라는 본래의 명분과 아랍 세계의 지주임을 자처합니다. 따라서 당시 서방 세계의 대표적 존재이며 실제적으로도 구원이 있는 미국에 대한 도발은 어떤 형태로든 예상되고 있었고 미국 또한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혁명 후 군수 부품 공급등을 통해 관계정상화와 사전 예방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카터 행정부는 이란 혁명 정부의 경직된 입장을 오판하여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왕의 입국을 허가, 이란 측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유발시켰고 호메이니는 팔레비 송환을 강경히 요구, 그를 확인코자 의사단의 파견을 미국에 제의하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 인질사태는 1980년 9월 다소 유화된 호메이니의 요구 조건 제시로 돌파구가 마련되었고, 동월 22일 이라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란 -이라크 전쟁은 이란으로 하여금 인질 사태를 종식하지 않을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 이란 측의 후퇴가 기대되는 가운데 미국의 협상 제의가 거듭되었고, 알제리의 중재로 양국간 간접 협상이 진행되어 미국이 동결된 팔레비 왕정 당시의 재미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 , 1981년 1월 20일 사건 발생 444일 만에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인질 전원을 석방함으로 미,이란 인질사태는 종식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나의 이슬람 혁명이며 이에 따른 미국의 오판이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79년 1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휴양을 이유로 출국(사실상은 망명이었다)하고, 2월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귀국, 샤푸르 바크티아르 과도 정부를 붕괴시키고 6월 신권적 지배 곧 종교가 다스리는 나라(신정국가)인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이란은 팔레비 왕정의 전제 공포 정치에 항거한 민주주의 세력, 외세 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소위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교조적 이슬람 세력 등 3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서방 세계의 대표적 존재이며 실제적으로도 구원이 있는 미국에 대한 도발은 어떤 형태로든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미국 또한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혁명 후 군수 부품 공급 등을 통하여 관계정상화와 사전 예방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카터 행정부는 이란 혁명 정부의 경직된 입장을 오판하여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왕의 입국을 허가, 이란 측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유발시켰다고 합니다. 호메이니는 팔레비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그를 확인코자 의사단의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