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의 이름은 이항복(1556~1618)이고, 어린시절 부랑배의 우두머리로 보냈으나 곧 학업에 열중해 25살에 알성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지냈고, 우의정과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음의 이름은 이덕형(1561~1613)이고, 호는 한음(漢陰)입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성품이 점잖아 총각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스무살 되는 해 3월 별시문과에 급제해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 지냈다고,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항복과 이덕형을 가리키는 말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1580년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병조판서 자리를 서로 번갈아 맡으면서 국난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성 이항복은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를 했고, 이이의 추천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고 합니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는데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와 왕비를 호종했고, 세자의 분조를 보필하여 군무를 맡았으며, 능란한 외교 솜씨로 명의 원군 파병과 양국 사이의 여러 문제를 조정했습니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음 이덕형은 1597년 (선조 30) 5월 명나라 장수인 경리 양호 (楊鎬)와 제독 유정 (劉綎)의 접반사가 되어 명군의 파병, 시시각각의 전쟁 상황, 명군과 일본군 사이의 화친 교섭, 둔전 경작을 통한 경비 조달, 군사 배치 등 각종 상황을 조선정부에 전달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