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충흔 전문가입니다.
피 묻은 옷에 과산화수소를 부었을 때 나타나는 격렬한 반응은 우리 몸속의 보호 기작과 과산화수소의 강력한 산화력이 만난 결과입니다.
거품이 발생하는 일차적인 원인은 혈액 속 적혈구와 세포들에 포함된 카탈레이스라는 효소 때문입니다. 카탈레이스는 대사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기는 유독한 과산화수소를 물과 산소로 빠르게 분해하여 세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과산화수소를 피에 부으면 이 효소에 의해 순식간에 분해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때 기체 상태로 방출되는 산소가 액체와 섞여 하얀 거품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품보다 더 중요한 화학적 변화는 과산화수소가 분해될 때 생성되는 라디칼 형태의 활성 산소가 일으키는 산화 반응입니다. 혈액의 붉은색은 헤모글로빈 중심에 있는 철 이온과 이를 둘러싼 포르피린이라는 고리 모양의 유기 구조에서 나옵니다. 포르피린은 탄소 원자들이 단일 결합과 이중 결합을 교대로 반복하는 긴 공액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하고 붉은색을 반사합니다.
과산화수소에서 유래한 강력한 활성 산소는 이 포르피린 고리의 이중 결합 부위를 공격하여 끊어버립니다. 유기화학적으로 볼 때, 색을 나타내던 공액 구조의 연속성이 파괴되면서 분자는 더 이상 가시광선을 특정하게 흡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붉은색을 띠던 헤모글로빈 분자가 무색의 작은 분자들로 조각나면서 핏자국이 탈색되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활성 산소는 헤모글로빈 중심의 철 이온을 산화시켜 단백질 구조 자체를 변성시킵니다. 이러한 강력한 산화력은 색소 파괴뿐만 아니라 세균의 세포막과 단백질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소독 효과도 함께 가지게 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혈액뿐만 아니라 옷감의 염료 분자까지 공격할 수 있어, 섬유의 종류에 따라 옷 자체의 색깔이 함께 빠질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