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는 언제 만들어졌었나요?
안녕하세요
'청장관전서'라는 책은 무엇을 다루고 있나요?
청장관전서의 저자는 누구이며
이 책이 나올 당시의 왕은 무슨 왕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덕무의 전집. 정조 19년(1795)에 그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엮어 펴냈다. 71권 25책의 사본(寫本).
존결(存缺)을 포함한 전체의 구성 서목은 다음과 같다. 권1·2에 영처시고(嬰處詩稿), 권3∼5에 영처문고(嬰處文稿), 권6∼8에 영처잡고(嬰處雜稿)·예기억(禮記臆), 권9∼20에 아정유고(권13·14·17·18은 결본), 권21∼24에 편서잡고, 권25·26에 기년아람(紀年兒覽), 권27∼31에 사소절, 권32∼35에 청비록, 권36∼47에 뇌뇌낙락서(권36∼41은 결본)가 수록되어 있다.
권48∼53에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54∼61에 앙엽기, 권62에 서해여언(西海旅言)·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산해경보(山海經補), 권63에 열상방언(洌上方言)·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병정표(丙丁表), 권64·65에 청정국지, 권66·67에 입연기(入燕記), 권68·69에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권70·71에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영처시고」·「영처문고」·「영처잡고」 등은 소년 시절에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처자(處子)의 뜻이나, 저자 자신의 자호(自號)처럼 제명한 것이다. 「예기억」은 『예기』에 대한 연구로, 제가주설(諸家註說) 내지 자의(字義)를 고증, 비판한 것이다.
「아정유고」는 일명 「청장관고(靑莊館稿)」라고도 한다. 저자가 직접 시문 등을 가려 모은 것으로, 왕명에 의해 간행된 『아정유고』와는 내용과 분량이 다른 것에 주의해야 한다.
「편서잡고」는 편찬 관계의 문자를 수록한 것으로, 그 가운데 송사보전(宋史補傳)이 중요하다. 즉, 정조가 일찍이 『송사 宋史』가 조잡하게 편찬된 것을 유감으로 여겨 신하들에게 산정(刪定)을 명해 40책을 만들고, 그 보전(補傳)을 이덕무에게 명해 찬하게 한 것이다.
「기년아람」은 원래 이만운(李萬運)이 편저한 것인데, 그 편차와 내용이 미비한 점을 이덕무가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 「사소절」은 선비·부녀자·아동들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한 규범을 적은 것이다. 「청비록」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것이다. 「뇌뢰낙락서」는 일종의 중국 인물지(人物志)로서, 특히 명나라 말기 유민(遺民)에 관해 여러 기사(記事)를 토대로 발췌하고 일일이 인용 서목을 부기하였다.
「이목구심서」는 글자 그대로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으로, 삼관기(三官記)와 같은 유의 것이다. 「앙엽기」는 일종의 소논문집·자료집 또는 소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흥미 있고 참고할 거리가 많이 실려 있다.
「청정국지」는 일본의 세계(世系)·지도·풍속·언어·물산 등을 적은 것이며, 「입연기」는 연행록(燕行錄)이며, 「한죽당섭필」은 사근역(沙斤驛: 경상남도 함양) 찰방시절의 견문기다. 부록에는 「선고연보(先考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중국 문사와 주고받은 서간을 수록한 「천애지기서」가 있고, 경기 지방의 속담을 모은 「열상방언」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장관전서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장관전서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의 저술 총서입니다.
청장관은 저자의 호 입니다. 아들 이광규가 편집, 이완수가 교정한 것으로 모두 33책 71권 이었습니다. 현재는 결본을 포함한 전서(사본)가 오직 두 군데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영조 때 이덕무가 전집 하고 정조 때 그의 아들 이광규가 엮어 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장관전서 [ 靑莊館全書 ]
조선 후기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李德懋)의 시문집.
구분 : 필사본, 시문집
저자 : 이덕무(李德懋)
시대 : 조선 후기
소장 : 규장각도서
필사본. 71권 32책. 규장각도서. 검서관을 지낸 아들 광규(光葵)가 편집하였고, 이완수(李琬秀)가 교열하였다. <아정유고(雅亭遺稿)> <영처고(處稿)> <청장관고(靑莊館稿)> <사소절(士小節)>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등 20여 종의 저술로 구성되어 있다. 권1~2는 <영처시고(處詩稿)>, 권3~4는 <영처문고(處文稿)>, 권 5~6은 <영처잡고(處雜稿)>, 권7~8은예기에 대한 연구인 <예기억>, 권9~20은 이덕무 사후에 정조가 왕명으로 간행하게 한 <아정유고>로, 이 중에는 정조의 명으로 서울을 노래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와 규장각을 찬미한 <규장각팔경(奎章閣八景)>이 주목된다.
권21~22는 사서(史書) 편찬에 관한 <편서잡고(編書雜稿)>, 권23은 <송사전금열전(宋史筌金列傳)>, 권24는 범례 및 논찬으로 <무예도보통지범례(武藝圖譜通志凡例)> <병지주군제론(兵志周軍制論)> <규장전운범례(奎章全韻凡例)> 등이 포함되어 있다. 권25~26은 <기년아람>으로 원래 이만운(李萬運)이 중국과 조선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권27~31은 선비와 부녀자, 아동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예절과 수신의 규범을 기록한 <사소절>, 권32~39는 고려~조선의 역대 시인에 대한 시평, 권40~47은 중국인물지(中國人物志)인 <뇌뇌낙락서(磊磊落落書)>, 권48~53은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 권54~61은 역사 ·풍속 ·서적 ·경전 등에 관해 고증한 <앙엽기(葉記)>,권62~65는 잡저(雜著)로 서해지방 기행문인 <서해여언(西海旅言)>, 경기지방의 방언을 모은 <열상방언(洌上方言)>, 서찰을 모아 만든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병자호란의 시말을 기록한 <병정표(丙丁表)> 등으로 구성되었다.
권66~67은 연경에 갔다 온 기행문인 <입연기(入燕記)>, 권68~69는 경상도 지역을 견문하면서 쓴 <한죽당섭필>로 구성되었다. 권70~71은 부록으로 이광규가 찬한 <선고적성현감부군계보(先考積城縣監府君系譜)>가 수록되어 있다. 저자의 다채로운 학풍과 치밀한 고증이 나타나 있는 저술로, 영 ·정조대에 꽃핀 학문과 문화운동의 성과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1978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國譯本)을 간행하였다.
청장관전서를 지은 이덕무의 일화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에 미친 바보(看書痴)'라고 부를 만큼 책을 아끼고 독서를 즐겼다. 서얼 출신이었던 그는 "배고픔과 추위, 근심과 번뇌 그리고 기침을 잊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책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았다.
"글을 읽을 때는 시간을 배정한 다음 정한 시간을 넘겨가면서 더 읽어도 안 되고 덜 읽어도 안 된다. 재주와 기질이 왕성한 사람들은 그 능력에 따라 과정을 정해 꾸준히 읽는다면 커다란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책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중).
이덕무는 실제로 책을 통해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파리 대가리만큼 잔 글자를 읽고 모기 다리만큼 잔 글씨를 쓰며' 학식을 넓히는 한편, 저술 활동도 계속해 71권 32책에 달하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남겼다.
그는 또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한시사가(漢詩四家)'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에 이름을 떨친 문장가였다. 소품문들은 그의 합리적인 세계관과 함께 기발한 문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흰 좀벌레 한 마리가 나의 「이소경(離騷經)」에서 '추국(秋菊)ㆍ목란(木蘭)ㆍ강리(江籬)ㆍ게거(揭車)' 등의 글자를 갉아먹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잡아죽이려 했는데, 조금 지나자 그 벌레가 향기로운 풀만 갉아먹는 것이 기특하게 여겨졌다"('책벌레만도 못해서야' 중).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 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끝내는 돈 200전에 팔아버렸오. 그 돈으로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했다오. 그런데 영재도 굶주린 지 오래되었던 터라, 내 말을 듣고는 즉시 「좌씨전」을 팔아서 남은 돈으로 나에게 술을 사주더군"('이서구에게' 중).
이런 글과 함께 산문집에 묶인 여행기, 논평, 서간문들은 꼿꼿한 삶을 살다간 '참선비'의 모습을 전한다.
"선비는 마음 밝히기를 거울같이 해야 하고 몸 규제하기를 먹줄같이 해야 한다. 거울은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기 쉽고 먹줄이 똑바르지 않으면 나무가 굽기 쉽듯이, 마음을 밝히지 않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저절로 가득 차게 되고, 몸을 규제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나를 경계하며' 중).
이덕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절친한 벗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했다.
"그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난 뒤 나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울먹이면서 혹시라도 이덕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라는 일화가 있다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 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17) ~ 1793(정조17))의 저술 총서로,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는 조선후기 학자 이덕무의 저술을 모두 모아 엮은 전집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701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17) ~ 1793(정조17))의 저술 총서로, 정조 19년(1795) 내탕금을 받아 아들 이광규가 편집하였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17) ~ 1793(정조17))의 저술 총서로, 정조 19년(1795) 내탕금을 받아 아들 이광규가 편집, 간행하였다. 저자의 다채로운 학문 성향을 알 수 있으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당세의 실학 중심 학풍 가운데 박학하고 계몽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한국의지식콘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