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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관세동맹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1830년대 성립한 독일의 관세동맹은 어떤 배경과 이유에서 성립이 된 것인가요? 그리고이 관세동맹에 결과는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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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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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34년 프로이센 주도하에 결성된 독일 관세동맹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관세동맹이다. 이 동맹은 그 후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의 정치적·군사적 통일의 중요한 전제(前提)가 되었다. 이 동맹으로 대내관세(對內關稅)가 철폐되고, 화폐·어음·도량형·교통제도 등의 국내적 경제영역의 통일이 이룩되었으며, 철도망의 발전과 더불어 광범한 국내시장의 형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독일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발전을 준비하게 하였다. 한편 대외공통관세(對外共通關稅)는 수입금지적인 고율의 육성관세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국내산업의 성장을 크게 도울 수 있었다. 이 동맹은 1871년 독일제국의 탄생과 함께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세동맹 [customs union, 關稅同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 관세 동맹은 1834년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여 시작한 관세동맹이 최초였지만1차 대전 이후에 사라졌다가, 2차 대전 끝난 후에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 부르크의 베네룩스 3국간 관세동맹이 체결된 것을 현대 관세동맹의 시초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나중에 유럽연합 EU이라는 완전 경제 통합이라는 형태에 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의 관세동맹과 1848년 혁명

    빈 회의 이후의 독일에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각종 소요가 일어났으나 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평화시대가 찾아왔다.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계기는 농민해방과 영업자유령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본격적인 산업화가 전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재편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농민해방 이후 독일 농업은 재편성 단계에 들어섰다. 농노제가 폐지된 엘베 강 동쪽지방에서는 귀족들의 대농장 경영이 확대되어 융커의 농업 자본주의 경영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대규모의 농업노동자층을 형성했다.


    이들 대토지 경영에 종사한 융커 계급은 지방경제만이 아니라 행정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1834년 독일연방에 소속된 대부분의 국가를 포함하는 관세동맹(Zollverein)이 결성되었다. 이에 가입하지 않은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북서 연안지역뿐이었다. 약 40만㎢의 면적과 2,500만 명의 인구를 포괄하는 관세동맹의 의미는 정치적 통일에 앞서 독일의 경제적 통일을 성취했다는 데 있다.


    이로써 관세동맹의 주역인 프로이센은 중유럽에서 우위를 다투는 오스트리아와의 경쟁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이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된 것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기반을 확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국가 형성이라는 과제의 해결은 요원했다. 같은 국민으로서의 일체감 형성에 필요한 다양한 집단간의 유대는 형성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은 개별국가의 테두리 속에 폐쇄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8∼49년의 혁명은 사회적 해방운동과 더불어 국민적 일체감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840년대 후반 유럽 대륙을 휩쓴 경제적 불황은 대중적 불만을 혁명으로 확산시켰다. 때마침 프랑스 2월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전역에서도 소요가 일어나고 혁명적 기운이 퍼졌다. 반동의 총수 메테르니히는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했으며 베를린에서는 국왕의 헌법제정 약속에도 불구하고 시가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