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킴 뮈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이며 기병대 지휘관으로써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군인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조아킴 뮈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67년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아무교육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된 뮈라는 1787년 기병연대에 입대, 1792년 전쟁이 일어나자 빠르게 진급하기 시작합니다 .1795년 10월 나폴레옹이 왕당파 반란의 진압 임무를 맡게되자 위라는 파리시에 포병대를 투입하는데 공을 세우며 뮈라가 기병을 이용해 빼돌린 대포를 파리 시의 고층 건물의 옥상에 설치하는데 성공한 나폴레옹은 포병 화력으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 전속부관이 되며,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에서 계속해서 큰 공을 세우며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때 중요한 몫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 이 쿠데타의 성공으로 제 1집정이 된 나폴레옹은 누이동생 카롤린을 뮈라와 혼인시켰습니다.
1800년 마렝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데 이어 1801년 부르봉 왕가가 다스리던 나폴리 왕국에 폴리뇨 조약을 강요해 이탈리아 반도를 제압,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자 뮈라는 원수로 승진합니다.
1805년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발을 묶은 후 항복시킴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결국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패전하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 이듬해 1806년 예나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을 추격해 섬멸, 그의 경력 중 가장 뛰어난 것은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기병 돌격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던 나폴레옹의 본대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의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일라우 전투의 공로로 뮈라는 대공의 작위에 오르지만 뮈라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고위직을 꿈꿨으며 에스파냐에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왕세자 페르난도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자 뮈라는 모두 퇴진시키고 자신이 에스파냐의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획책, 에스파냐 국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진데다 세련되지 조차 못했던 이 음모는 양자의 퇴진까지 강요하는데 성공하나 마드리드 폭동을 불러일으킵니다
1808년 5월 2일 발생한 폭동은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나 에스타냐 사람들이 서로 뮈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뮈라의 에스파냐 왕위로의 꿈은 이미 산산조각난 후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뮈라를 위로하기 위해 원래 나폴리의 왕이였던 그의 형 조제 보나파르트를 나폴리 대신 에스파냐의 왕으로 봉하고 그를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봉했습니다.
뮈라는 나폴리의 왕으로 부임 후 , 1812년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해 남부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의 씨를 뿌렸으며 이탈리아의 통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수밖에 없으며 누가 그 지도적 위치에 서느냐의 문제만 남았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자신의 그 지도적 위치에 서기 위해 후일 리소르지멘토에서 중요 역할을 수행하게 될 비밀결사들을 고무함으로 민족주의의 씨도 뿌렸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뮈라는 나폴레옹을 종군하여 보로디노 전투에서 다시 큰 공을 세우나 모스크바로부터 철퇴하는 프랑스 군의 질서정연한 후퇴를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국 나폴리가 걱정되어 홀로 서둘러 귀국함으로 엄청난 재난을 초래, 러시아 원정의 파국적인 결과로 제 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뮈라는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유지할 것인지 동맹국들과 협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온존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데 이 중립 상태는 나폴레옹이 몰락할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뮈라는 빈 회의에 대표사절단을 파견해 부르봉 왕가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고자 획책합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가 발발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 출진한 사이를 틈타 나폴레옹을 내쫓고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내통, 특히 뮈라는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져도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고 오히려 라이프치히 전투에 출진하려는 외젠을 막았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배, 프랑스 제국군을 도와주는 폴란드의 용맹스러운 지휘관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가 전사합니다.
빈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고있는 사이,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 백일천하를 시작하는데 뮈라는 마지막 순간 결정적으로 판단을 그르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나폴리군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를 향하여 진격, 이때 나폴레옹은 이미 재기할 가망이 전혀 없을 정도로 몰락한 이유였기 때문으로 톨렌티노 전투에서 대패한 뮈라는 나폴리 왕국의 국왕에서 쫖겨난 뒤 코르시카로 도주, 유랑자가 된 뮈라는 칼라브리아섬에서 나폴리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하고 총살로 사망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라킴 위라는 나폴레옹의 친인척이자 2인자 였습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가 발발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 출진한 사이를 틈타 나폴레옹을 내쫓고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었지요. 특히 뮈라는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져도 나폴레옹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라이프치히 전투에 출진하려는 외젠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은 끝에 패배했으며 프랑스 제국군을 도와주는 폴란드의 용맹스러운 지휘관 조제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가 전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