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있었던 타율성론이라는게 뭔가요?

너그****
2023. 06. 01. 03:46

안녕하세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타율성론'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주장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총 4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는 식민사관에 기반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했으며 타율성론은 정체성론과 함께 일제의 식민사관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한국의 역사가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전개되지 못하고 외세의 타율적인 강제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들은 20세기 초 일본의 만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중국사에서 분리된 만선사를 주장, 만주와 한국의 역사를 하나의 체계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었는데 한국사의 독자적 영역을 부정하는 체계 속에서 한국사는 자주성과 독자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타율성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이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은 미시나 쇼에이 이며 그는 1940년 발행한 조선사개설의 서설에서 조선사의 타율성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으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성격이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반도적 성격은 사대주의라는 한국사의 성격을 형성하였다고 하였으며, 한국은 절대적 존재로 생각되는 국가에 의존해 복종하면서 국가를 유지, 정치, 문화적으로 그들의 것을 모장하는 타율적인 역사를 전개해왔다고 주장합니다.

2023. 06. 0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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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타율성론 >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 논리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역사가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세의 간첩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주장 입니다.

    일제는 이른바 식민사관에 기만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타율성론은 정체성론과 함께 일제 식민사관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한국의 역사가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전개되지 못하고, 외세의 타율적인 강제에 의해 전개 되었다는 주장 입니다.

    2023. 06. 0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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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타율성론(他律性論)은 한국사 안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타율적이고 종속적 역사만을 강조한 것이다. 한민족은 자율적인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외세에게 지배와 영향을 받음으로써 발전을 이룩해 왔다는 주장이다.

      -출처:위키백과

      2023. 06. 0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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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총독부는 1915년 7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사업은 중추원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중추원 소속 관원이 최대한 참여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추원 서기관이었던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 1875~1929)가 사업을 총괄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부정하면서도 통치기조인 ‘동화’를 합리화하고, 식민지화의 원인을 한국의 역사에서 찾으며, 식민통치를 ‘문명개화’로서 평가하고자 조선반도사 편찬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자료 수집이 지연되어 사업기한이 연장되고, 1919년 3·1운동 등 당시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완결되지 못하였습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의 자국사 연구는 더욱 고조되어 민족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기원으로서 단군에 대한 인식은 상식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전적 시각에서 역사를 체계화하고자 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조선 총독부 관료나 일본인 역사가들도 더 이상 한국과 일본이 ‘동족’이라고 강조하거나, 한국의 역사를 폄하하는 것이 한국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총독부의 역사편찬사업은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이 공포되고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사편찬위원회는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로 상설화되고 예산과 조직이 크게 확장하면서 조선사 편찬 작업은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선사편수회는 정무총감이 수장을 맡았으며, 고문과 위원에 다수의 한국인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조직이 대폭 확장되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쿠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1874~1946)였습니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반도사와 같이 특정 역사상을 제시하는 통사의 서술이 아닌 한국사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하여 간행하는 『조선사』 편찬을 표방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역사편찬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조선사』는 1932년 제1편 제1·2권이 발간된 이래 한 권씩 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력 부족 등의 어려움으로 1938년 3월이 되어서야 제6편 제4권의 발간을 끝으로 『조선사』 간행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조선사』 편찬에 활용된 자료는 4,950책과 4,510매의 사진, 453점의 문권(文券)·화상(畵像)·편액(扁額)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편찬된 『조선사』는 신라 혁거세 거서간 원년인 B.C. 57년부터 청일전쟁 전인 1894년 6월까지를 6개의 시기로 구분해 총 6편 35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사』는 문장으로 된 서술식 역사서가 아니라 연·월·일순으로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을 요약하여 싣고, 그 사건과 관계되는 사료의 목록을 제시한 것입니다. 즉, 사건과 이를 전하는 사료의 나열로 앞의 기사와 뒤의 기사가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사』 4·5·6편에 해당하는 총 24권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데, 이는 『조선사』 편찬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이 조선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는 일본인 한국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했던 ‘당파’, ‘치적 혼란’, ‘외침’ 등과 밀접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에서 망국의 원인을 찾으려 했던 통치상의 필요에 비해 일본 학계의 연구는 미비했으며, 방대한 자료가 흩어져 있어 그 수집·정리의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지배 정책의 입안을 위해 혹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대내외적 혼란을 부각하기 위해 선별된 사료들을 기반으로 『조선사』를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사』를 편찬함으로써 일제는 한국역사에서 타율성과 정체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정하였던 것입니다.

        2023. 06. 01.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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