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중국 역사 있어서 황건적의 난이 있는데 왜 황건적이라 부르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또한 발생의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 말기에 태평도라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반란입니다. 황건 반란이라는 이름은 반란군이 노란 두건과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 장보, 장량 세 형제가 스스로를 천장군, 지장군, 인장군이라 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결국은 나라가 부패에 빠지고 일반 농민들이 살기 어려워져서 불만이 늘어나고, 국력이 떨어지면서 이런 지도자들이 나타나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이게 반란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건적은 음양 오행에서 흙의 덕을 나타내는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데에서 황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 일어난 종교집단 태평도의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 봉기 혹은 역성혁명으로 거록 출신인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 스스로를 대현양사라고 자칭하고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을 사용해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의 전형적인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며 무리들을 모았습니다.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하여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의 8주에 무리들이 퍼졌으며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으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 각지의 주, 군 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칩니다.
그 뒤 조정에서 황건적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당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돚우에 병사해 중심을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했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 했으며 이들 잔당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패한 영제는 환관을 총신하면서 먹고 마시고 놀 줄밖에 몰랐다. 국고의 돈이 바닥나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환관들은 서원에 특별한 상점을 만들어놓고 백성들의 돈과 재물을 갈취했다. 돈 있는 자들은 거기서 마음대로 관직과 작위를 살 수 있었다. 조정의 부패와 지주 토호들의 압박으로 백성들은 빈궁해질 대로 빈궁해진 데다가 해마다 이어지는 자연재해에 더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록(巨鹿)에 삼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는 장각(張角), 둘째는 장보(張寶), 셋째는 장량(張梁)이었다. 이들 삼 형제는 능력이 출중했거니와 마음씨도 좋아서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장각은 의술에 정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곤 해서 다들 그를 좋아했다. 지주 토호들의 압박과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태평성대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종교를 이용해 농민을 조직하기로 하고 태평도(太平道)를 창시했다.
그와 제자들은 민간에 깊이 파고들어가 태평도를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10년 동안 태평도는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고 신도 수는 수십만으로 늘어났다. 장각은 전국 8개 주의 수십만 신도들을 36개 방(方)으로 나누었다. 큰 방은 1만여 명이 넘었고 작은 방은 6∼7천 명이 되었다. 각 방에는 수령을 하나씩 세우고 전 조직은 장각이 지휘했다.
갑자년(184년) 3월 5일에 36방은 일시에 봉기를 일으키기로 비밀리에 약정했다. 그들이 내세운 구호는 ‘창천이사(蒼天已死), 황천당립(黃天當立), 세재갑자(歲在甲子), 천하대길(天下大吉)’이었다. 뜻은 ‘창천(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누런 하늘)이 서리라. 갑자년이 되면 천하가 대길하리라.’인데 여기서 ‘창천’은 후한 왕조를 가리키고 ‘황천’은 태평도를 가리켰다. 장각은 사람들에게 명해 낙양의 각 사원과 각 주·군의 관청 대문에다 ‘갑자’라는 글자를 백묵으로 써놓게 했다. 봉기의 암호였다.
그런데 봉기를 한 달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뜻하지 않는 변이 생겼다. 봉기군 내부에 변절자가 생겨 이 사실을 후한 왕조에 고해 바쳤던 것이다. 그러자 장각은 봉기일을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장각은 천공장군을 자칭하고, 장보는 지공장군, 장량은 인공장군을 자칭했다. 장각의 명령이 전해지자 36방의 농민들은 일시에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 봉기군들은 머리에 황색 두건을 써서 ‘황건군(黃巾軍)’이라고 불렸다.
황건군 소식을 들은 영제는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외척인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세우고, 황보숭(皇甫嵩)·주준(朱儁)·노식(盧植)을 장군으로 삼아 두 갈래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관군은 위세가 당당한 봉기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관군은 도주하기에 바빴다. 대장군 하진은 영제에게 청하여 각 주와 군의 병력을 조달받는 한편, 각지에서 병정들을 모집하여 황건군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자 종실 귀족들과 주·군의 장관들, 그리고 호강 지주들은 황건군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들을 모집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서로 땅을 쟁탈했다. 그 결과 나라는 순식간에 여러 개로 나뉘었다.
후한 조정과 호강 지주들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 속에서 황건군은 고단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황건군의 수령인 장각이 불행히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장보와 장량이 봉기군을 이끌고 관군들과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그들도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잔여세력들은 그후에도 20여 년이나 싸움을 계속했다. 황건 봉기는 대규모적인 농민 봉기였고, 그 충격으로 부패한 후한 왕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중국상하오천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