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로고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아메리카노한잔
아메리카노한잔23.11.14

조선의소현세자는 왜 독살당했을까요.?

조선의 왕자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조선에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독살당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의 시신이 검게 변했고, 이목구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이는 독살 시 나타나는 증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승정원일기가 전산화 되기 전 실록에 의존할 당시 이덕일이 제시한 수많은 독살설 중 실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생각되었고 인조의 행동으로 연구자들도 한때 독살을 비롯한 타살 가능성에 동의했습니다.

    그 근거로는 청나라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현세자는 앓기 시작했고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이 학질이라 했습니다.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되나 소현세자는 사흘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은 의문투성인데 학질이라는 병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여름에 걸리는 전염병인데 세자는 늦은 겨울 2월에 돌아왔기 때문, 병증이 학질이 맞다 하더라도 약 처방이 아닌 침을 놓는 시술을 시행한 것도 납득이 어려운 부분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건 한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방대한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고 세자의 질병을 상세히 기록한 심양일기, 시강원 스승들이 작성한 소현세자의 학창생활 즉 소현동궁일기의 국역과 출간이 이뤄진 시점에 당시 정세를 단편적으로나마 자세히 볼수있게 되며 의학적 관점에서도 연구가 됩니다.

    위의 추론만으로 독살을 단언할수 없게 되었고, 대신 다른 가능성이 제기, 평소 지병이 있던 소현세자가 17세기 한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병의 급성 악화로 사망, 당시 인조는 그런 상황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소현세자의 돌연사를 유발한 그 지병이 무엇이었는지는 추론 영역이되며, 인조, 소용조씨가 소현세자를 숙청하고도 남을 맥락과 앞뒤 정황이 있다보니 독살 혹은 타살설 역시 정황상, 대중적으로는 설득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왕 인조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인조의 치욕스런 굴욕이 있었기에 소현세자가 반청운동에 선봉에 설 것으로 믿었던 인조와 신하들 백성들의 바램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포교를 위해 심양에 머물러있던 천주교 신부 아담 샬을 통해 또다른 서양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실리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는 인조 등에게 의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청 황실과의 교분을 통해 인조를 왕에서 내리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한 것으로 오해하여 9여년의 시간을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하자 마자 병석에 있다가 죽게되니까 독살을 당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조선에 영구 귀국하였으나 인조는 그를 그다지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인조는 신하들이 세자를 맞이하여 진하하는 것조차 막았습니다. 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체질도 강건하지 못하여 많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4월 23일에 학질에 걸리더니, 불과 사흘 만인 4월 26일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다.

    이때 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피를 흘리고 있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하여,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인조가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을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 것은 자신은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당사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장사와 교류를 한다는 것에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현 세자가 아담샬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에 호의를 보인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현세자가를 죽음과 세자빈 강씨를 역모죄로 사사하고, 짧게 장례를 치른 것도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