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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4.27
피휘법(?)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요?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선 국왕의 휘, 즉 왕의 이름에 쓰인 한자들을 전부 외워야 했고,

그래서 자식들의 이름에 그 한자를 넣으면 안되었다고 하는데,

이게 관습인지, 법으로 정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피휘는 언제부터 유래된 것인가요?

그리고 조선의 국왕들의 피휘 한자가 늘어나면,

나중에는 사용할 수 있는 한자들도 적어질텐데,

이런 대비는 없었나요?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나라에서 피휘법은 고려 때 유행하였다. 역사서, 문집, 금석문의 탁본 등 고려 때 나온 자료의 문장을 조사해 보면, 태조의 아버지인 세조의 휘자 ‘융(隆)’, 태조의 휘자 ‘건(建)’, 혜종의 휘자 ‘무(武)’, 정종의 휘자 ‘요(堯)’, 성종의 휘자 ‘치(治)’, 목종(穆宗)의 휘자 ‘송(誦)’을 피휘하기 위해 결획하거나 대자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피휘결획은 ‘{{%113}}’·‘{{%114}}’·‘{{%115}}’·‘{{%116}}’과 같이 획의 일부를 궐필(闕筆)해 식별이 비교적 단순하지만, 피휘대자는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바꾸어 썼기 때문에 식별이 좀 까다로운 편이다.

    세조의 휘자 ‘융’의 경우 ‘정륭(正隆: 금나라의 연호)’을 ‘정풍(正豊)’으로 바꾸어 썼고, 태조의 휘자인 ‘건’의 경우 ‘건안(建安: 후한 헌제의 연호)’을 ‘입안(立安)’, 그리고 ‘건염(建炎: 남송 고종의 연호)’을 ‘입염(立炎)’으로 바꾸어 썼다.

    혜종의 휘자인 ‘무’의 경우 ‘홍무(洪武: 명나라 태조의 연호)’를 ‘홍호(洪虎)’로, 후한 무제(武帝)를 ‘호제(虎帝)’로 바꾸어 썼다. 또한 966년(광종 16) 5월에 세워진 문경의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 ‘무반(武班)’이라는 관직을 ‘호반(虎班)’으로 피휘하였다.

    성종의 휘자인 ‘치’의 경우 ‘지치(至治: 원나라 영종의 연호)’를 ‘지리(至理)’로, ‘혁거세 치(治) 육십 년’을 ‘혁거세 이(理) 육십 년’으로 각각 바꾸어 썼다.

    이외에도 국휘의 범위가 넓어지자 왕의 이름만이 아닌 태자(太子)의 이름도 피휘하는 경우가 있었다. 1133년(인종 11) 2월에 원자(元子) 철(徹: 의종)을 태자에 책봉하였는데, 당시 문신이었던 김부철(金富轍)이 김부의(金富儀)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또한 1198년(신종 1)에 왕의 이름인 탁(晫)과 같은 발음을 가진 탁(卓)씨 성을 가진 자는 외가(外家)의 성(姓)을 따르도록 하고, 만약 내외가(內外家)의 성이 같은 경우에는 내외조모(內外祖母)의 성 중에서 하나를 따르도록 명령하였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피휘법은 고려 때 유행하였다. 역사서, 문집, 금석문의 탁본 등 고려 때 나온 자료의 문장을 조사해 보면, 태조의 아버지인 세조의 휘자 ‘융(隆)’, 태조의 휘자 ‘건(建)’, 혜종의 휘자 ‘무(武)’, 정종의 휘자 ‘요(堯)’, 성종의 휘자 ‘치(治)’, 목종(穆宗)의 휘자 ‘송(誦)’을 피휘하기 위해 결획하거나 대자한 것을 볼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피휘는 고대 중국에서 비롯해 우리나라에는 고려때 유행하였습니다.

    한자를 어쩔수 없이 써야했거나 그 뜻을 써야 할 경우가 부득이하게 있었다면 연려실기술에서 언급되었듯 뜻이 같은 다른 한자를 쓰거나 아예 그 한자의 방음으로 대체했습니다.

    경전에 부득이하게 피휘해야 하는 한자가 적혀있때 대체 한자로 치환해 읽거나 모(某)로 바꿔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