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가 죽은 후 유골이 7번이나 참수당했다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조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는 기가막인 지략으로 세조를 왕으로 추대한 1대공신이었는데요
그가 사후 유골이 7번이나 참수를 당했다던데 어떤 이유로 그런일을 당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명회의 유골이 7번이나 참수당한 이유는, 그가 조선시대 세조의 장자방(장창영)이었지만 이후 세종대왕과의 정치적 불화로 인해 숙청을 받고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세조 때 군사기술과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왕위를 계승한 후, 이전의 장자방 출신으로서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한명회와의 충돌로 인해 이들 사이에 심한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종대왕은 한명회를 배척하고, 그의 부정행위를 찾아내어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처형된 한명회의 유골은 세종대왕의 명령에 따라 7번이나 참수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교훈으로써, 반역이나 국왕을 배반한 자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문과 후손까지 모두 불의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각시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의 일등 참모였던 한명회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토막나고 한양 저잣거리에 목이 효수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한명회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세조의 장자방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정치적 갈등과 사건에 휘말려 괴로움이 많았습니다.
한명회는 정치적으로 영의정(寧遠君)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영의정에게 쫓기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시간을 보낸 강화도에서 도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체포되어 참수당했습니다.
이후 그의 유골은 처음 참수당할 때 형벌로 사용된 나무와 함께 일제히 치워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묘소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국왕 봉안의 명분으로 복원되었으며, 그는 지금까지도 고인돌로 된 무덤 안에 안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