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핫뉴스실시간 인기검색어
아핫뉴스 화산 이미지
아하

학문

역사

귀요미판다곰198
귀요미판다곰198

고부 농민 봉기 당시 손화중이 거사에 불참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894년 1월 무장 접주 손화중이 조병갑의 폭정을 알고서도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 농민 봉기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장 접주 손화중과 고부 민란을 일으키려 한 전봉준은 손화중의 조카인 손여옥(孫如玉)을 매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이들은 1893년 11월에 손화중의 힘을 얻고자 집으로 찾아와 거사를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손화중은 교주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와 전략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1894년 1월 고부 민란 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동학교도들을 탄압하자, 3월 초에 무장기포에 이어 1차, 2차 봉기를 주도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합류해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최경선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했습니다.

      전봉준이 공주를 공략하다 실패한 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패배하면서 농민군을 11월 말 해산, 청주 방면을 공격하던 김개남의 농민군도 해산되자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손화중도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