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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일개미
고독한일개미23.01.15

애국가 가사를 작사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대한민국 국가인 애국가는 작사자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윤치호 혹은 안창호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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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하게 부르고 또 부를 줄 알아야 하는 노래, 애국가.

    그 애국가에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숨어 있다. 바로 '애국가 가사를 누가

    지었나' 하는 것이다.


    ▷ 1919년 3월 1일에 우려 퍼진 올드랭 사인곡의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 가사와 같다


    우리는 애국가 하면 안익태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작사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안익태가 1935년 현재의 애국가 곡조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의 가사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80년 전 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바로 그날,1919년 3월 1일에도 일제의 총칼 앞에서 우리 민중은 영국민요 '올드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 외국인 선교사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는 이미 1910년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 모두 5人의 애국가 작사설!


    그렇다면 그 오래 전 애국가 가사는 과연 누가 지은 것일까? 애국가 작사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모두 5명-민영환, 최병헌, 안창호, 김인식, 윤치호-이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문제가 뜨겁게 달아 올랐던 1955년 이래 이 다섯명이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가능성은 후손과 학자들에 의해 끊임 없이 제기됐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 애국가 작사자를 밝힐 열쇠- 증거자료 철저 분석!


    5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문헌기록과 증언 친필 자료 등을

    총망라하여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의문을 풀어본다.

    1. 민영환이 지었다는 애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 대한제국 시대엔 또 다른 애국가가 있었다.

    2. 정동교회 초대목사 최병헌은 사택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불변가를 지었다. 그것이 현재의

    애국가라는 후손의 주장. 그러나 6.25때 사라진 불변가. 불변가는 과연 존재했을까?

    3.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무수한 증언들, 그 증언의 허와 실은?

    4. 내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김인식의 증언과 일기!

    5. 일본 외무성에서 발견된 '1910년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윤치호의 애국가!




    음악시평 ‘애국가고’안창호 작사설 극력 부정



    1948년 9월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공포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한다. 이 기관은 일제하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적극적으로 도운 친일분자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는 일을 기본업무로 하였으며 ‘반민특위’로 약칭되었다.

    반민특위가 가동을 시작할 무렵인 동년 10월6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는 좌익계열 음악평론가 박은용의 ‘애국가고’라는 음악시평이 실린다. 묘한 시기에 발표된 이 글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거론한 최초의 신문보도로 꼽히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1947년 5월 출판된 춘원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기록한 것에 대한 반론 제기에 있음을 밝힌 박은용은 애국가의 <안창호 작사설>을 극력 부정하고 대신 친일분자로 거론되고 있던 <윤치호 작사설>을 극력 주장한다.

    《도산 안창호전》 제6장 ‘상해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원은 매일 아침 사무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원래 애국가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애국가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좌익활동을 하다 이후 월북한 박은용은 우익성향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안창호에 대해 적의에 찬 맹공을 가한다.


    “실로 무근거하고 허망한 것은 안창호 작사설이다. 도산은 1978년생이니까 애국가가 저작된 독립협회 발족 당시엔 불과 17,8세의 소년이었으며 더구나 그는 독립협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다. 있다면 그도 당시 많은 청년들과 같이 가담했다가 뒤에 임정에서 교시한데 불과하리라.”

    박은용은 (주관적인 견해를 상당히 표명하며) 애국가의 윤치호 작사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윤기선의 집에 전해오는 윤치호의 필적 중에는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실명이 붙은 애국가의 가사지가 있다. 그의 다른 필적과 대조해 보아 틀림없는 그의 친필이다.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의한 관사가 붙게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친필이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은 애국가가 작사된 연대에 관한 일이다. 윤씨의 가사지에는 1907년 작이라고 쓰여 있으나 내 생각 같아서는 그것을 필서한 연대의 기록일 것이다.


    기자협회 발행인 협보 제2호에 게재된 서정주의 <자유보>에는 ‘독립협회 발족 당시에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정주의 말에 의하면 이 사실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구술을 받은 필기 중의 일절이라고 하니 여기에 더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립협회 2대 회장을 지낸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할 가능성은 넉넉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뒤 개화청년들의 입을 통해 구전해 오던 것을 1907년 윤치호는 느낀바 있어 우연히 이것을 필사하고 여기에 필사한 연대를 적기했던 것임은 눈으로 보듯이 확연하다. 윤치호는 1908년에 15장으로 된 <찬미가>를 그의 이름으로 발행했는데 그 14장에는 이 애국가를 수록까지 하였다. 이 책은 본인이 소지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공개할 용의가 있다.”

    박은용이 ‘애국가고’에서 최초로 언급한 <윤치호 친필 가사지>와 <찬미가>는 이후 애국가 작사자 규명과정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그 증거력에 찬반양론이 맞서게 된다.

    반민특위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던 일제경찰 출신들의 협조기피로 조사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정부와 여당의 공작으로 1949년 8월 22일 반민특위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이 기구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폐지된다.




    애국가의 작사 윤치호다 주장


    그동안 애국가의 작사자로는 최병헌설, 윤치호설, 안창호설, 김인식설, 민영환설, 남궁억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는데 어느 주장에 의해서도 결정적인 근거나 사료가 제시되지 못했으며,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국가의 작사자는 미상으로 남겨져 왔었다.

    ‘동해물과 백두산…’ 애국가 가사를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1865~1946)가 지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기독교 서지연구가 신인수(서울 회현교회 장로)씨는 ‘윤치호 쟉(작)가 애국가’를 수록한 ‘셰(세)계명쟉(작)가곡집- 무궁화’ 책자를 미국 LA에서 입수해 16일 공개했다. 1931년 LA 종우서관이 펴낸 노래집으로, 편집·발행인이 LA 리들리(Reedley)지역에서 교육자로도 활약한 한석원 목사다.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scotch folk song’(스코틀랜드 민요)이라 적은 올드랭사인 곡조에 ‘동해물과 백두산…’부터 ‘이 긔(기)상과 이 맘으로…’까지 1~4절 가사와 함께 노래집 앞부분에 담겼다.


    서지학자 겸 애국가연구가 김연갑씨는 “이번에 발굴한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일제의 한국 강점기 국내외서 출판된 인쇄물 가운데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명기한 최초의 자료”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도산 안창호가 이끈 신민회가 주관한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애국가 가사와 일치하는 ‘국민가’가 ‘윤치호 작’이란 이름으로 실렸지만, 제목이 ‘애국가’가 아니어서 논란이 돼 왔다”면서 “이번 윤치호 작사 애국가는 곡명과 가사, 작사자가 정확히 일치해 애국가연구의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안녕하세요. 이장웅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국가 작사가가 과연 누구냐는 끝없는 물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민영환, 안창호, 윤치호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애국가의 작사가가 밝혀지고 있지 않은데요, 그건 바로 애국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1890년대에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두고 여러 단체와 지도자들은 아리랑처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후렴을 넣어 애국가로 말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1,000수가 넘게 불려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아리랑의 작사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애국가도 애국가 부르기와 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던 많은 사람이 작사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애국가를 누가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답변이 도움 되셨기를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 초에 쓰여졌는데, 작사자는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미상이라고 합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5201


  • 안녕하세요.

    애국가 작곡가는 안익태입니다.

    하지만 작사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등 5명이 단독 또는 합작으로 가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공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1955년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조사위는 증거 부족으로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설입니다.

    윤치호가 1945년 편찬한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가 고쳐져 실려 있는데 이 가사가 현 애국가 가사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윤치호의 친일전력에 대한 국민정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