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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회퇴변척소 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한국사 조선시대 내용에 회퇴변척소 라는게 있던데 이게 무슨 내용인가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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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0년(광해군2년)에 동국오현으로 문묘에 종사 된 5인 중에서 회재 이 언적과 퇴계 이 황의 잘못을 따져 문묘에서 퇴출하자고

    주장한 상소입니다.

    - 1611년(광해군3년)에 대북의 영수 '정인홍' 상소 올림.

    - 이 후 유생들의 목록인 '청금록'에서 삭제되었다.

    - 정인홍의 스승인 남명 조 식을 옹호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남명 조 식의 서원을 건립하고, 대북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등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발생.

    [출처] 회퇴변척소|작성자 무뢰한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0년 동국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된 5인 중에서 회재 이 언적과 퇴계 이 황의 잘못을 따져 문묘에서 퇴출하자고 주장한 상소입니다.

    성리학적 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은 왕조 초기부터 문묘배향문제를 논의하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중종대 사림층에 의해 정몽주의 문묘 배향이 성사됩니다. 사림층의 주도로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정몽주를 상징으로 하는 조선이 도학적 전통이 마련되었습니다.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한 정치세력은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층으로 정몽주의 문묘 배향은 충절과 절의를 중시한 그들의 하군 배경이 반영된 결과였고 이후 문묘 배향에 대한 논의는 동방 5현의 배향으로 이어지는데 이 논의를 주도한 것은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림층이었고 구체적으로 이황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 5현이라고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해 노력해 광해군대에 5현은 문묘에 배향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인홍 등 대북 세력은 회퇴변척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퇴출시키고자 했고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며 정인홍이 이황 제자들에 의해 성균관 유생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회퇴변척소 (晦退辨斥疏)

    광해군 3년 3월 정인홍이 상소를 올림.

    회퇴는 "회재" 이언적의 (회)와 "퇴계" 이황의 (퇴)를 딴 것이고,

    변척밝혀서 드러낸다는 뜻이다.

    상소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이언적과 이황이 아닌 "성운과 조식"이 문묘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

    정인홍은 문묘에 조식이 빠진 가운데 이황만 배향되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다. (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

    이황은 주자학을 정교하게 설명했고,

    조식은 행동에 옮길 수 없는 그런 논리의 개발은 무익하다고 보았다.

    신진사림에게 더 큰 공감을 얻은 사람은 그러나 이황이였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11년 3월에 정인홍은 차자를 올려 조식에 대한 이황의 비판을 조목조목 설파 해명하고, 아울러 회재와 퇴계의 과오를 비판하였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언적과 이황이 고관으로 벼슬하면서 이를 막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이황이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것을 또 하나의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 행실로 비판하였다. 또한 퇴계가 조식과 성운을 노장의 풍으로 비판하였지만, 퇴계 자신도 노장을 본받는다고 힐난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해군시대 사건으로 회퇴변척은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이다.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벌이게 되어 정국이 큰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