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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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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제 침탈하기 위해서 병참 기지화 정책과 남면북양 정책 및 산미증식 계획 재개 했는데, 그 내용과 결과가 궁금합니다.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적, 물적 자원 수탈을 극대화 하네요.

1930년대 경제 침탈하기 위해서 병참 기지화 정책과 남면북양 정책 및 산미증식 계획 재개 했는데, 그 내용과 결과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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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참기지화정책은 1920년대 후반 세계적인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면서 일본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경제 블록이 형성되었고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 수탈당합니다. 일제는 만주사변 , 중일전쟁 등 대륙침략을 강행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으려했고 조선총독부는 경제대공황으로 비롯된 일본 자본주의의 위기를 타개하고 식민지 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의 공업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발전소, 군수 공장건립, 관상 개발, 금속, 기계, 중화학 공업 육성 등을 시행해 일제의 전쟁 수행 목적하에 한반도의 경제를 식민지 경제체제로 보다 철저히 예속하고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군수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에 따라 군수 산업만 기형적으로 성장합니다.

    산미증식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 자본의 급속한 축적으로 농민의 대이농과 도시 노동자의 급증이 발생하고 매년 60~70만에 달하는 인구가 증가합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식량수급을 악화시켜 1918년 쌀소동이 발생하고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증산을 강행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함으로 자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려했습니다.

    제1계획은 1920~1925, 제2계획은 1926~1934년이며 조선총독부는 최초 30년 계획으로 총 80만 정보의 토지개량을 계획하고 1차로 15년동안 총공사비 2억 4000만원을 들여 42만 7000정보를 개량, 연간 약 900만석을 중수해 그 중 460만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하나 1925년 공사착수 예정면적의 59%인 9만 8000정보 가량이 착수되고 준공 예정면적의 62%인 7만 6000정보가 준공, 농사 개령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불황으로 사업자금 조달이 어려웠으며 특수회사가 설치되지 않았고 토지개량에 의한 수익보다 토지 소유에 의한 수익이 높았으며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가 이유입니다.

    이에 일제는 정부 알선자금의 비중을 대폭 높이고 사업 대행기관과 추진기관을 정비해 1926년부터 12년동안 총공사비 3억 3000만원을 들여 35만 정보를 개량해 820만 석을 중수하려는 제2기 계획을 시행합니다.

    그럼에도 예정면적의 47%인 16만 5000정보를 개량할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제 2기 계획은 1930년대 실적이 극히 저조했는데 이는 공황기의 쌀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 악화, 정부 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 때문입니다.

    결국 산미증식계획은 농업공황으로 인한 쌀 가격의 폭락, 조선 쌀의 수출에 따른 일본의 농촌경제를 악화로 1934년 중단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참기지화 정책-

    1930년~1945년 일제가 대륙 침략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수행한 정책.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면북양 정책(南棉(綿)北羊政策)은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농민에게 강요한 정책으로 일본 제국의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의 하나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면화를 재배하게 하고, 북쪽에서는 가구당 5마리씩 양을 사육하게 한 정책이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