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왕조는 어떤 왕조였었나요??
안녕하세요.
노르만 왕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왕조였었나요?
노르만 왕조의 시기는 언제 였으며
또 노르만 왕조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잉글랜드 왕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 앵글로색슨 민족의 웨식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1066년부터 1135년까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정복왕 윌리엄 1세, 윌리엄 2세, 헨리 1세까지 3대에 걸쳐 군림했으며, 헨리 1세가 프랑스 리옹 생드니에서 전사하면서 왕가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가 앙주 백작이었던 조프루아 플랑타주네[1]과 재혼했고, 무정부시대 이후에 둘 사이의 장남인 헨리 2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에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현대의 윈저 왕조 모두 노르만 왕조를 뿌리로 한다.* 역사
기원은 노르드인 바이킹의 모험가 롤로였다. 롤로는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에게 신종하는 대가로 루앙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아 '루앙 백작'이 되었다. 롤로와 그의 후손들은 계속 노르망디 지방을 장악해 나아갔고, 곧 노르망디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 윌리엄 1세가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버린 게 아니었으므로 잉글랜드 왕인 동시에, 프랑스 카페 왕조의 신하이기도 했다.[2]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와 재산을 조사한 《둠즈데이 북》을 보면,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에는 2,000명이 넘는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있었으나 정복 이후에는 300명 내외만 남았다. 노르만 문화는 잉글랜드 곳곳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과 대륙식 성채들을 기반으로 뻗어나갔으며, 바이킹의 정복 이후 북유럽 문화권이었던 잉글랜드를 프랑스계 대륙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노르망디에 처음 정착한 롤로 이후 5대 동안 노르만인들은 프랑스 문화에 동화됐다.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이를 잉글랜드 내에서도 유지했기에, 오늘날 영어에 프랑스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족이 상류층으로서 군림했으므로 특히 고급 어휘 및 상류층 어휘에 많은 족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pork(프랑스어로는 porc, 돼지고기), beef(프랑스어로는 bœuf, 쇠고기), mansion(프랑스어도 철자가 동일, 집) 등이 그렇다.[3] 그렇다고 소수 노르만이 앵글로색슨을 모두 학살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앵글로색슨의 문화와 혈통 역시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백년전쟁 시대에는 노르만족의 동화가 완료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익히 아는 '잉글랜드인'(English)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헨리 1세가 아들없이 프랑스 생드니에서 전사하면서 노르만 왕조의 부계가 단절이 되었지만, 딸 마틸다를 통해 그 뿌리가 계속해서 플랜태저넷 왕조로 이어졌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백작의 앙주 일대 영토와 노르만 왕조의 노르망디 영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얻은 아키텐 영토 등,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절반을 아우르는 영역을 지배하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프랑스 내 유력제후로 군림했으나,(앙주 제국) 프랑스 내 영역을 존 왕 때 거의 다 날리고 브리튼 섬 만으로 가문의 영토가 줄어들었다. 다만,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 중 채널 제도는 프랑스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섬들이었지만, 그 지배력을 유지하였고, 현재도 영국령이다.[4]
노르만 왕조 이후로 잉글랜드에서는 프랑스어의 유입으로 인해 순수 영어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애설레드와 애설스탠 등등 고귀하다는 뜻을 가진 'Æðele'과[5] 다른 명사를 결합해 만드는 인명들이 상당히 인기있었고, 지배층,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다. 그래서 왕의 이름으로써 굉장히 많이 쓰였지만,[6] 노르만 정복 이후 새로운 지배층이 된 노르만족을 따라 앵글로색슨족들이 프랑스어에서 건너온 이름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붙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잉글랜드로 들어온 남자 이름으로는 헨리 (Henry), 리처드 (Richard), 윌리엄 (William), 로버트 (Robert) 등이 있고[7] 여자 이름으로는 앨리스 (Alice), 마틸다 (Matilda) 등이 있는데 이런 이름들은 현재까지도 영미권에서 흔한 이름들이 됐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쓰이던 앵글로색슨족 이름으로는 에드워드(Edward)[8]가 있는데 사실 이 이름도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잊혔다가 후에 참회왕 에드워드를 존경했던 헨리 3세가 자신의 아들[9]에게 이 이름을 붙이면서 왕실과 지배층 사이에서도 다시 유행하며 복고? 부활했다고 한다.[10]*노르만의 멍에 (Norman Yoke)
중세 이후 잉글랜드 내에서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 싹트며 노르만 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유행한 휘그 사관(Whig Historiography)[11]은 중세의 앵글로색슨족 사회는 비교적 수평적이었고 자유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등 비교적 평등했던데 비해 대륙에서 봉건제를 들여온 노르만족 지배자들은 권위적인 압제자들로 그렸다. 특히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이후 반가톨릭주의가 잉글랜드의 국가 정체성으로 이어지자 개신교 영국인들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전 교황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로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가 더욱 가톨릭의 영향력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르만 정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노르만 왕조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르만 왕조는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권력을 행사한 왕조로, 영국 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왕조는 노르만인들의 선박 기술과 전쟁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노르만 왕조의 특징 중 하나는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노르만인들의 활약입니다. 바이킹은 해적이자 정복자로 활동하며, 유럽을 정복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해군과 유연한 전쟁 기술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을 습격하고 정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노르만인들은 탁월한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에 필요한 방법을 개발하여 대서양을 넘나들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을 활발히 이루었습니다. 이를 통해 노르만인들은 상업적인 교류를 촉진하고 문화적인 영향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노르만 왕조는 그들의 선박 기술과 전쟁 기술로 인해 유럽 역사에서 두드러진 존재였으며, 노르만인들의 영향력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넘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노르만 왕조는 스칸디나비아 역사와 유럽 특히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르망디가는 노르망디 공작 및 잉글랜드 국왕 작위를 가진 중세 귀족 가문이다. 1066년 노르만 정복 때부터 플랜태저넷 가가 권력을 얻은 1154년까지의 잉글랜드 역사를 노르만 왕조 시기라고 한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