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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20

고구려 시절, 가장 군사력이 강한 시기는 어느 왕때인가요?

안녕하세요

고구려 시절 가장 군사력이 강했던 시기는 광개토대왕이 왕으로 있던 시기 아닌가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친구 말로는 장수왕때까 가장 강력했다고 하거든요

어느 왕 때의 군사력이 가장 강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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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수왕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 ·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마무사'란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고구려 당시에는 '철기'란 이름으로 불러졌습니다. (삼국사기 동천왕 기사에 '철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흔히들 고구려 군사력하면 이들 개마무사를 떠올리기 쉽상인데..마치 개마무사는 천하무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술더떠 개마무사 즉 온몸에 쇠갑을 두른 기병전력은 고구려가 원조이고 고구려만의 전유물인양 주장하시는 분들도 더러 계시더군요.

    그러나, 이 개마무사는 고구려가 원조도 아니거니와 고구려만의 전투양식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근동의 사마티아인들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철갑기병을 구성하여 로마에 협력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와 동시대 몽골초원의 유목제국들과 북중국에서도 상당히 유행하던 군사편제였던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의 철기부대가 주변국가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좀더 위력을 떨쳐던 것도 사실이고 선비족이나 북중국 위나라 등이 이 고구려 철기의 막강한 위력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것도 사실입니다. 더구나,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제철기술을 자랑하던 가야가 서기 5세기 무렵 광개토태왕이 파견한 고구려 철기군단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던 기록도 유명하죠.

    그렇다고 고구려 철기가 백전백승의 무적의 군대였느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동천왕때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때 고구려의 철기 오천이 관구검의 방진에 의해 패퇴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부분에 대해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합니다. 방진이라고 하니까 관구검의 위나라군대가 대부분 보병전력을 가지고 고구려의 철기 기마부대를 섬멸했을걸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때 관구검이 고구려원정에 데리고 온 주력부대는 한족이 아니라 바로 선비족들이었습니다. 방진은 보병만 짜는것도 아니고 기병들도 방진형태로 진형을 갖출수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의 철기가 패퇴당했던 것도 기동력을 앞세운 선비족의 이들 경기병들에 의해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645년 고당전쟁때, 고구려 남부,북부욕살 고혜진 등이 이끈 고구려 기병전력이 당나라군의 계략에 의해 적진 깊숙히 들어갔다가 사방에서 포위해오는 적기병에 의해 1차기병전에서 패퇴당했던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고구려 철기 등 고구려의 기병이 북중국이나 북방유목제국과의 기병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승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6세기 세계최강 기병대라 자타가 공인하던 돌궐의 기병전력을 신성 부근에서 온달장군 등이 이끄는 고구려, 말갈 연합기병이 패퇴시켰던 기록이 있는데 이당시에도 고구려기병에 철기가 동원?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 벽화중에 고구려 성 주위에서 서로 철기를 두른 고구려개마무사와 적의 장수가 싸우는 그림을 볼 수 있듯, 고구려군은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고구려 정예군이 출전하는한 (고구려 정예병이 아닌 말갈병을 동원하여 신라나 백제, 거란족, 북중국 등을 치게한 경우도 적지 않았음)이들 철기가 최전선에서 투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철기군단이 상대적으로 주변세력에 비해 좀더 강력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군더더기 말들 다 제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첫째, 지금도 중공의 대표적인 철광석 산지인 무순지역이 당시 고구려에서도 대표적인 제철산지였던데 있습니다. 더구나 이지역의 쇠의 질은 동아시아 타지역에서 나는 쇠덩이보다 그 질이 매우 우수했고 지금도 그 우수성은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제철기술은 당시 타의추종을 불허할만큼 매우 우수했던바, 예전에 kbs역사스페셜 고구려 무기편에서, 과학자들이 고구려의 화살촉을 가지고 실험했던바, 현대 제련기술과 필적할정도의 강력한 강도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정도로 고구려 군대와 말이 두른 철갑과 고구려군대가 쓰던 무기의 강도가 이웃나라들보다 더욱 우수했기에 고구려군대의 전력이 앞설 수밖에 없던 것도 당연합니다.

    두번째, 아무리 말이 우수한 철갑을 몸에 두르고 돌진한다해도 말품종 자체가 그 무거운 철갑을 오래입고 버틸만한 체력,지구력 등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철갑의 위력은 제대로 빛을 발하기가 힘들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말은 북중국,남중국, 훗날 수나라 당나라에서도 매우 탐낼정도로 우수한 품종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옛 동예와 옥저가 산지로 알려진 '과하마'란 말입니다.

    과하마란 쉽게말해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체구가 아주 작은 말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이 과하마가 그렇게 아주 작은 말이냐? 그건 아닙니다. 몽골의 조랑말 정도의 크기로서, 다만 옥저, 동예와 같은 거친 산악지대에 살던 말이다 보니, 산을 매우 잘타고 지구력이 좋고 힘이 셌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기 위해 개마고원같은 가파른 산악지대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과하마와 같은 지구력과 힘이 좋은 품종 덕분이었습니다.

    세번째, 사냥을 평생의 생업으로 삼았던 고구려인들의 활솜씨도 한몫했습니다. 우리는 12세기 몽골군대가 세계최강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의 비결이 바로 그들의 궁술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원지대에서 주로 유목을 생업으로 하던 유목민들의 궁술과 거친 산악지대에서 사냥 이나 약탈을 생업으로 하던 수렵민족의 궁술 기량의 차이를 비교하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저는 고구려인과 같은 수렵민족의 기량이 더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본래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 송화강 유역의 부여에서 내려온 맥부족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나라이나 부여의 적대세력들을 피해 남하하여 내려온 지역이 지금의 지린성 지방으로 주로 거친 산악지대였습니다.

    따라서, 건국초부터 부득이하게 사냥이나 전쟁 약탈을 통해서만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고, 바로 이들 고구려인들이 맞딱드려야 했던 주변세력들도 활솜씨 한가닥하는 부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시조 추모태왕이 훗날 자신의 부인이 되는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을 무릎꿇렸던 것도 활겨루기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들 산악지대에 사는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어릴때부터 활을 가지고 사냥을 생업으로 해야하기에 주로 말이나 가축을 돌보며 부차적으로 이웃부족과의 전쟁이나 가축을 노리는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활을 드는 유목민들보다 활다루는 솜씨가 더 우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험난한 지형때문에 말을 가지고 계속 이동할 수없어 도보로 산을 타야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 더구나 당시 지린성과 개마고원 등 가파른 산악지대에 너무나 흔했던 맹수들과도 살기 위해 격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마저 흔했던 터라 이들의 용맹함 내지 싸움능력이 유목민들보다도 더 뛰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박희와 같은 무술도 사실 언제 맞딱드릴지 모르는 맹수를 제압하기 위해 익히게 된 것이 그 태동이라 볼 수 있죠.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약탈과 전쟁을 주업으로 삼았던 나라로서, 북중국을 선비족이 야탈하고 유린했다지만 바로 이들 선비족 거란족들을 약탈하고 유린했던 존재는 바로 고구려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뛰는놈위에 나는놈있는 격입니다.

    고구려 유리왕때 고구려가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하여 줄기차게 한나라의 동북방을 유린했던 사실이나, 훗날 힘을 좀 키웠다는 선비족을 상대로 고구려군이 박살냈던 것도 다 이런 무력적 배경이 있었다고 봅니다.

    11세기, 거란의 야율야보기에 의해 동방의 대국이었다는 발해가 심각한 내부분열로 힘 한번 못써보고 거란족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그런데, 거란의 성종이 자신들의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지금은 우리가 저들 발해인들을 지배하고 있으나, 용력으로 따지면 천하에 발해인들을 당할 자들이 있겠는가?"

    즉, 거란인들도 발해인들의 용맹함 전투력이 자신들보다 뛰어났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소위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도 잡는다"라는 말이 당시에 유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거란이 북송을 칠때나 심지어 고려와의 전쟁을 벌일때도 수많은 발해인들이 동원?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들도 계실줄로 압니다.

    네번째, 아무리 무쇠로 두른 철기라 해도 이들 철기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철기부대는 그 상당한 중량의 갑옷때문에 전신에 이를 두른 군인이나 말 모두 얼마안가 금방 지칠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철기부대가 최전방에서 V자 형태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린다해도 이들 철기들은 긴창을 이용한 적의 보병대가 사방에서 둘러싸 공격해 들어오면 이도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상당한 피해를 입는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따라서, 이들 철갑기병이 적의 진형을 흐트러뜨리면 바로 이에 보조를 맞춰 경기병이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측면내지 후방을 도모합니다.

    철기가 먼저 적의 진형을 흐트리고 이와함께 경기병이 기동력으로 적의 측면과 후방을 교란하면 이때 그 뒤에 있던 부월수 창병, 도수 등과 같은 보병부대가 뛰어들어 적들을 살상하는 것입니다.

    고대전투는 사실 진형 싸움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만일 진형이 무너지면 그때에 비로소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것이죠.

    아무리 대군 대 대군의 전투라하더라도 진형이 유지되는한 쌍방의 인명피해는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진형이 무너지면 그 틈을 노려 적군이 돌격해들어오면 마치 강둑의 돌이 하나 빠져 둑전체가 물쌀에 우르르 무너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이때부터 우왕좌왕하는 사이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이죠.

    이는 612년 살수대첩때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을지문덕장군의 계략에 빠져 무리하게 평양성 부근까지 진격했다가 지친 병사들로 인해 후퇴할 당시, 사각형의 방진을 꾸리고 청천강쪽으로 북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궁수들이 일제히 수많은 화살들을 난사하고 고구려철기가 적의 한면을 공격해들어오자 이와함께 고구려 경기병이 다른 면을 협공하면서 진이 무너졌고 이때부터 중국인들로서는 지금도 끔찍한 악몽이자 치욕인 살수대첩의 대학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아무튼, 고구려는 우수한 제철기술, 뛰어난 품종의 말, 그리고 고구려인 자체의 용맹함과 전투력. 그리고 단궁 맥궁으로 알려진 우수한 활,

    마지막으로 건국초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전쟁으로 익힌 전쟁기술, 전략전술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거죠.

    이렇게 고구려 철기부대는 진영 맨 앞에서 일렬로 대기하고 있다가 지휘관의 신호가 떨어지면 V자로 가운데의 지휘관이 맨앞으로 돌진하여

    적의 진영을 흐트려놓습니다. 그럼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경기병들이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양옆으로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치죠. 그럼 바로 그 뒤의 부월수와 같은 보병부대가 진열이 흐트러진 적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하는 그런 방식이 주로 사용?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태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통치 기간 동안 상당한 영토 확장과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이끈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수왕보다 정복 전쟁을 더 많이 했던 왕이 광개토태왕입니다. 사실 두 왕 모두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서 고구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들이긴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부터 그의 아들 장수왕 때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북진 정책을 장수왕은 남진정책으로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