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아메리카노한잔
아메리카노한잔23.08.15

이성계가 대승한 황산대첩은 어떤전투였나요?

공민왕의 아들인 10살이 된 우왕이 갑자기 왕이되고 세력을 키운 이성계 장군이 삼남지방에서 전투를 벌러서 대승을 거둔 황산대첩은 어떤 전투였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산대첩(荒山大捷)은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황산[1]에서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전투입니다.

    1376년(우왕 2년) 홍산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해주(海州), 그밖에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던 중, 1380년(우왕 6년) 9월에 황산에서 또한 크게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서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후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발생배경


    1376년(우왕 2년) 홍산(鴻山)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는 지리산·해주(海州), 그밖에 가는 곳마다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던 중, 1380년(우왕 6년) 9월에 황산에서 또한 크게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2.결과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산 대첩이란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지리산 근처의 황산 에서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전투 입니다. 1376년(우왕 2년) 홍산(鴻山) 전투에서 최영의 군사에 크게 패한 왜구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1378년(우왕 4년) 5월 대마도로부터 대거 침입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 방면으로 침입하였고 이를 격퇴 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76년 홍산대첩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1380년 8월에는 진포(鎭浦:錦江入口)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羅世)·최무선 등이 화통(火황산대첩 폰트 이미지 1)·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순찰사(慶尙都巡察使)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咸陽) ·운봉(雲峰) 등의 험지(險地)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南原)에서 배극렴(裵克廉)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花水里)에 세워졌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