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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쌍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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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활자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나요?

해인사에서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보존성과 가치가 큰데

금속활자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나요? 아니면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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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오래 보관할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재료를 잘 골라야 한다고합니다. 고려인들은 경험을 토대로 산벚나무를 선택했다고합니다. (흔히 자작나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산벚나무의 한자 표기인 ‘화목(樺木)’의 잘못된 번역이라고 추정된다고합니다) 산벚나무는 물관이 나이테에 골고루 퍼져있어서 수분 함유율을 일정하게 유지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면 판자 내의 수분 분포를 균일하게 하고 나뭇결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합니다.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 놓은 후, 나무 판을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립니다. 그런 후 대패질한 나무 판에 글을 새긴 후, 틀린 글자가 없는지 정밀하게 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엄밀한 교정이 끝난 후 장인들이 나무 판에 글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긴다고합니다. 판각이 끝난 후 판에 옻칠을 하여 방충기능을 갖추었으며 판의 두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인 다음 경판 네 귀퉁이에 동판 장식을 달아 나무 판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게 했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금속활자와 상관없는것으로 압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초부터 불교가 전하는 말을 연구하고 해석한것을 목판에 새겨넣은 것인데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부처의 힘을 빌어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부터 지켜달라하여 만든 대장경이 초조대장경이었고 이후 몽골에 의해 초조대장경이 불타면서 다시 만든것이 재조대장경입니다. 이 재조재당경의 갯수가 8만장이 된다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목판임에도 그 보전성이 대단했는데요. 이는 나무의 선정단계부터 신중하였고 소금물에 절인 나무를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재료 준비에만 5년가량 정성을 쏟아 뒤틀리지 않고 강한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보존했던 해인사역시 팔만대장경을 위해 과학적으로도 뛰어난 장소에 보관했다고 ㅎ바니다. (최적의 기온과 습기 통풍을 다 고려)

    해서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게 된 자랑스런 우리나라 문화 유산입니다.

  • 대장경 경판은 목판을 준비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복잡합니다.

    나무를 선정하고,

    베어서, 바닷물에 담궈 해충 방지를 하고,

    켜서 다듬습니다.

    이렇게 준비한 경판에

    한지에 쓴 대장경 원본을 목판에 붙이고

    칼로 경판 새김에 들어갑니다.

    글자 하나하나 새기는 각수(刻手)는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솜씨의 장인이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 . 팔만대장경이란 약 팔만개의 부처님에관한 경판을 말하는것입니다,

    2. 고려시대1247~1248년동안 몽고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 백성들의 마음 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3. 과학적인면은 목판이 썩지않게 바닷물에 담궈놓고 그글자가 여러명이 썻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다 글자가 고르고 보관할 때 도 썩지않게 숯과 소금을 묻어두었기때문입니다

    금속활자

    1.청주흥덕사에서 1377년에 세계최초로 발명된 금속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2. 인쇄된 책중 직지는 상,하 두권이었는데 현재는 하권만이 남아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목판이고 후박나무를 썻다고 합니다

    모서리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하고

    나무판에서 글씨를 판것이 아니라 글씨주변을 파 글씨가 솟음으로 되있어 힘들게 만들었으며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13세기 고려 말기에 완성된 대장경으로, 대한민국 국보 제1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금속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기술로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책을 인쇄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나무판과 종이에 글자를 적어서 복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는데, 금속활자를 사용하면 글자를 한번에 만들어서 인쇄할 수 있어서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총 81,258장의 금속활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활자들은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각 글자마다 정교한 조각과 정렬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작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를 진행하면서 팔만대장경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금속 활자가 아닌 목판으로 인쇄를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니요 금속활자는 아니고 목판입니다

    해인사 장경각에 봉안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만든 대장경판으로 81,258매의 목판이다.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판에 이르고 8만 4천번뇌에 대치하는 법문을 수록하였다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린 후 두 번째로 새긴 것이므로 '재조대장경'(再造大藏經)이라 일컫는다.

    나무로 새긴 대장경이 오늘날까지 좋은 보존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선조들의 과학적인 지혜가 숨어 있다. 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은 동편의 가야산 자락과는 대략 20°정도, 서쪽의 비봉산 자락과는 10°의 경사각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맑은 날 햇빛을 받는 시각이 여름철에는 12시간, 봄, 가을에는 9시간, 겨울에는 7시간으로 정해져 있으며, 연간 계절풍은 여름에는 남동, 겨울에는 북서로 분다. 이런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장경각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가장 낮은 온도와 다습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내부 공간 기온은 온도차가 2℃를 넘지 않는다. 상대습도는 통상 80%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건조할 때에도 40%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이는 건조에 의한 경판의 변형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건축조영에 반영된 것이다.

  • 안녕하세요. 도지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으며 ,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 1,514종 6,569권으로 되어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장경 조판에는 판본을 수집하여 교감하는 일 외에 나무를 베어 썩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바닷물에 담가 기초 가공을 하고 경판을 만들어 한자한자 글자를 새겨 그 위에 다시 옻칠을 하고 방부처리를 한 후 경판 귀퉁이에 각목과 마구리를 대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수많은 공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81,258매에 이르는데 판의 앞뒤로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있어 실제로는 16만 면 이상을 새겼으며 이를 인출하기 위한 종이와 먹의 수급까지 포함하여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 비용 등을 고려하면 팔만대장경의 제작은 실로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고려가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고를 물리치고자 무신집권기인 고종(최우 정권)시 제작하였습니다. 금속활자가 아니었고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목판 인쇄였고 한글자 한글자 개인이 새기면서 부처님께 빌고 바라면서 우리 고려를 지켜 달라고 하는 염원이 담긴 대장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