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백관의 공복 제정에 대해 질문드려요

고려 광종 때 백관의 공복 제정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 뒤에 성종 때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면서 그 안에 백관의 공복을 신라,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정하자고 했다는데 그럼 광종 때 공복 제정한걸 그 뒤로 안 했다는 뜻인가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종 때 공복을 제정, (960년) 성종 때 유교적 특징에 따라 재정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시조 울구태(고이왕)가 요동에서 한반도로 밀려날때 공손도 가문과 동맹을 맺었었죠.

      공손도가문은 유력한 한족집안으로 요동태수로 있었지만 위나라를 거역하고 나라를 세우자, 노한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결국 멸망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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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구태는 공손씨와 교류하면서 앞선 중국문화를 일찍 익혔고 한강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건국할때

      중국의 시스템을 도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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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들의 의복을 정비한 것도 그 중 하나.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백관의 공복(公服)은 백관이 공사(公事)시 입는 옷으로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다음이다. 또는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인 사은(謝恩), 사퇴(辭退)하기 위해 왕을 찾아가 뵐 때 착용하였다. 외국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이 공사(公事)에 참여할 때 착용하기도 하였다. 공복은 복두(幞頭)에 포(袍), 대(帶), 홀(笏), 화(靴)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포의 색, 대의 장식, 홀의 재료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왕 이하 관리의 관복이 사라졌다가 복구되었다. 이 중 공복만 복구되지 못하여 공복을 착용해야 할 때는 흑단령(黑團領)으로 대신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부터 관모인 복두를 포함한 공복 제도가 해이해져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출처:지역문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