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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의 공복 제정에 대해 질문드려요

고려 광종 때 백관의 공복 제정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 뒤에 성종 때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리면서 그 안에 백관의 공복을 신라,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정하자고 했다는데 그럼 광종 때 공복 제정한걸 그 뒤로 안 했다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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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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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종 때 공복을 제정, (960년) 성종 때 유교적 특징에 따라 재정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시조 울구태(고이왕)가 요동에서 한반도로 밀려날때 공손도 가문과 동맹을 맺었었죠.

    공손도가문은 유력한 한족집안으로 요동태수로 있었지만 위나라를 거역하고 나라를 세우자, 노한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결국 멸망되고 맙니다.

    울구태는 공손씨와 교류하면서 앞선 중국문화를 일찍 익혔고 한강으로 내려와서 백제를 건국할때

    중국의 시스템을 도입하죠.

    신하들의 의복을 정비한 것도 그 중 하나.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백관의 공복(公服)은 백관이 공사(公事)시 입는 옷으로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다음이다. 또는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인 사은(謝恩), 사퇴(辭退)하기 위해 왕을 찾아가 뵐 때 착용하였다. 외국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이 공사(公事)에 참여할 때 착용하기도 하였다. 공복은 복두(幞頭)에 포(袍), 대(帶), 홀(笏), 화(靴)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포의 색, 대의 장식, 홀의 재료로 품계의 상하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왕 이하 관리의 관복이 사라졌다가 복구되었다. 이 중 공복만 복구되지 못하여 공복을 착용해야 할 때는 흑단령(黑團領)으로 대신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부터 관모인 복두를 포함한 공복 제도가 해이해져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출처:지역문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