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국의 성립과 멸망과정이 궁금합니다.
882년부터 1240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하였던 키예프 루스라는 나라는 현대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뿌리라고 여기는 국가라고 하는데요.
키예프 루스의 성립부터 멸망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키예프 루스의 전신은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862년에 오늘날 노브고로드에 건설한 공국인 노브고로드 루스로,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추드인, 드레블랴네인, 메레인, 벱스인, 크리비치인들이 루스인들을 내쫓고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으나 그 후 부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 다시 루스인들을 부르게 되었고 루스인들의 수장인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게 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키예프 루스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키예프 루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라츠크 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스몰렌스크 대공국, 페레야슬라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등의 류리크 왕조 출신의 제후들이 다스리는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난립하면서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가 되며 1237년부터는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점령되었으며, 결국 1240년에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의 키이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입니다.
키예프 루스의 전신은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862년에
오늘날 노브고로드에 건설한 공국인 노브고로드 루스로,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추드인, 드레블랴네인, 메레인, 벱스인, 크리비치인들이 루스인들을 내쫓고 통치하려 하였으나
그 후 부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 다시 루스인들을 부르게 되었고,
루스인들의 수장인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게 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1095년 십자군 정쟁이 일어나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한 중개 무역인 활성화되고 볼가강을 통한
중개 무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키예프 루스도 쇠퇴하기 시작해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분열되면서
이름만 남은 상태에 1237년부터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점령되면서 1240년에 멸망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 초기,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해 유럽의 동쪽 대부분은 슬라브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고 그 중 중앙유럽에 자리잡은 서슬라브와 발칸 반도에 자리잡은 남슬라브와 달리 동유럽에 자리잡은 동슬라브는 기독교 문명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러 부족들로 나눠져있었습니다.
그 중 키예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일대는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러시아 북서부는 슬라브족이 우랄계 민족이나 발트계 민족과 함께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8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이주가 시작, 9세기에 이르러 유리크가 이끄는 바랴그인 바이킹 세력이 855년 라도가호수에 정착, 862년 일멘 호수에 도달해 노브고로드를 선설, 류리크 사후 세력을 이어받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남하해 키예프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것이 키예프 루스의 시작입니다.
12세기 초반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 키예프 루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는데 당시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해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에 치명타였습니다.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 보다 대공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로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으며 대크킹시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루스를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으며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했으나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쫖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 되었으며 류리크 2세는 5번이나 즉위했습니다.
이렇듯 키예프 대공 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키예프가 각 공국을 통제할수 있는 힘 또한 약해졌고 키예프 루스는 므스티슬라프 1세대에 브세볼로드 1세의 자손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으로 추방했지만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이후 여러 공국들로 분열된 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 - 볼히니아 공국 등이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족을 주무르던 키예프 루스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면서 유목민족인 쿠만, 즉 폴로베츠족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괴로워했으며,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해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 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분열되어 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대패, 이번 침공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자 지나가다가 건들여본 정도였으므로 몽골군은 이기고도 그냥 돌아갔지만 시간이 흘러 1237년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진격했고 키예프 대공은 싸우기 전에 도망가고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 결국 치열한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처참하게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