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는 사살을 당했는데요 빈 라덴이 맞다 아니다로 논란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상 어떤 사실끝에는 확인되지않은 추측이ㅜ닌무하게 마련이지요. 달에도 안갔다는 추측도 사실화 하잖아요.시신의 모습이 빈라덴 같이 않다는 이유로 카더라 통신에 추측이 더해져서 나온 가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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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토속 신앙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람의 이기심에서 니온 인신공양.내가 죽는 사주에서 남을 희생시켜 나의 살을 피하는 아주 이기적인 방법에서 비롯된 뜻이라고 생각하구요...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토석신앙에는 공식적인 인신공양은 없는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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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화가 늦어진 원인은 쇄국 정책이 맞는 건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이 잘한것은 세도정치(지들끼리 다 해쳐먹는 기득권을 타파하고 민생을 돌본것) 그러나 쇄국정책은 근시안적 정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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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는 어떤 사상을 갖고있는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알베르 카뮈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모랄리스트이자 정치이론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세계에서 그의 세대의 대변가이자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글들은 주로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그리고 죽음이라는 임박한 파국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 의식과 환멸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카뮈는 많은 동시대인의 허무주의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진실과 중용 및 정의 같은 가치에 대해서도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후기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독단적 측면을 모두 거부하는 자유주의적·인도주의의 모습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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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소리에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장 먼저 생각나는게 뭐니뭐니해도 산속의 절 풍경소리 아닐까요~~~ 조용한 산속에서 영혼을 치유해줄것 같은 풍경소리!대~~한민국!^^ 응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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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최초의 여왕인 메리는 왜 블러드메리라고 불리게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명은 메리 튜더(Mary Tudor)이다. 재위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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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초기, 왜 고려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의 정치가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갑작스러운 변화보다 평화로운 점진적 정치를 꽤했기때문으로 보입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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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상징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함마드가 알라의ㅜ계시를 받을때ㅜ하늘에ㅜ떠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해지라때 무함마드의ㅜ밤길을 비쳐주었기때문에 이슬람의ㅜ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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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에게 생기는 사리는 무엇이며, 어디에 생기는건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신(遺身)·신골(身骨)이라고도 한다. 사시(死屍) 또는 유골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응음의 玄應音義≫ 제6에는 “사리는 바로 설리라(設利羅)라고 하며 번역하여 신골이라 한다.”고 하였다.사리는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형태에 따라 전신사리(全身舍利)와 쇄신사리(碎身舍利)를 말하고 있다. 즉 신체 자체로 볼 때는 전신사리이고 다비(茶毘)한 뒤의 신골은 쇄신사리라 할 수 있다.이 경우 쇄신사리는 세골(細骨) 내지 흰 분말의 경우가 있으나,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사리신앙이 더욱 신비화되어 둥근 구슬의 형태로 된 영골(靈骨)·영주(靈珠)로 인식되었다.즉 황금색의 분말에서부터 진주와 같은 구슬에 이르기까지 다비 후의 유신(遺身)이 사리로 신봉되었다. 보통 불사리(佛舍利)를 으뜸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 외 수행자의 유신인 고승의 사리 역시 신봉되어 탑을 만들기도 하였다.대체로 이 같은 신골사리 외에 부처님의 교설인 불경이 법사리(法舍利)로서 신봉되어 신골사리와 함께 불탑(佛塔) 속에 봉안된다. 부처님의 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불경을 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구분하고, 승사리를 봉안하는 곳은 부도(浮屠)라고 하여 뒤에 와서는 불탑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역사적으로 볼 때 석가모니의 열반 뒤 그 제자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의하여 유신을 다비하였더니 8곡 4두(八斛四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하여 이를 8국에 분배하여 봉안하였고, 그 뒤 아소카왕(阿育王) 때에는 팔만사천의 불사리탑을 건립하는 등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또 ≪대당서역기≫에는 현장(玄奘)법사가 돌아올 때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립(粒)을 가져왔다고 하였으며, 의정(義淨)도 사리 300립을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서역으로부터 불골(佛骨)이 전해져서 사리신앙이 널리 행하여졌다.우리 나라에서는 549년(진흥왕 10)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불사리를 보내왔으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興輪寺)에서 맞이하였다는 것이 사리 전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 뒤 안홍(安弘)이 진(陳)나라에 들어가서 법을 구하고 호승비마라 등과 함께 귀국할 때 ≪능가경 楞伽經≫·≪승만경 勝鬘經≫과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636년(선덕왕 5)에 당에 들어간 자장(慈藏)은 오대산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佛頂骨)과 치아(齒牙)사리 등을 받아서 645년(선덕왕 14)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오대산 중대에 적멸궁을 건립하고 그 지하에 정골을 봉안하였다. 그 밖에 월정사,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지리산 화엄사, 영월 사자사에 사리탑을 건립하였다.751년(경덕왕 10)에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사리를 봉안하였고, 그 뒤 신라 후기 및 고려시대에도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사리에 관한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매우 성행하였다. 태조가 대신에게 “사리가 어찌하여 생기느냐?” 하고 묻자, 하륜(河崙)이 “정기가 쌓인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수련하면 다 사리가 있습니다. 바다의 조개도 보주(寶珠)가 있고 뱀도 명월주(明月珠)가 있으니 조개와 뱀이 무슨 도가 있어서 그런 구슬이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왕이 웃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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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교대 , 사범대에 대해 문의 드립니다,. 왜 구분 된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교대는 초등학교 과정 교육을 전문으로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대학기관이고, 사범대는 중.고등과정을 양상하는 대학교육 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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