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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라는게 어떤 단체였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04년 8월 송병준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송병준은 조선 안에 친일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명령을 받고 친일파 인사들과 접촉하며 세력을 모았다.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한 후 8월 22일 일진회로 개명했다. 일진회의 강령은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고 내각을 교체하고 국가의 재정을 축소시켜 결국 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일제의 조선지배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나타냈다. 일진회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1월 6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진회는 <국민신보>를 통한친일여론 조성, 고종의 양위 책동, 의병토벌 등 각종 매국행각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진회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집회결사엄금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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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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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피아노 얼마나 쳐야 기본 정도는 마스터 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글쎄요... 사람마다 다르며 어떤 연주를 할까의 목표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1.좋아하는 가요나 팝송, 찬송가 정도의 반주를 하고 싶다!~~~ 할 경우 반주법과 코드진행 수업을 집중적으로 배우신다면 1년정도면 가능합니다. (단, 열심히 하셔야겠죠? ㅋㅋ)2.제대로 된 클래식 곡을 연주하고 싶다.(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슈만 연습곡 등)이럴 경우 차근차근 기초부터 잘 배우셔야합니다.테니스, 골프, 수영등 운동도 마찬가지죠!기초를 잘 배우면 처음엔 좀 힘들지만 나중엔 남들보다 빨리갑니다. 또 멋지고 제대로 폼이 잡히고 결과도좋습니다. 피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논,소나티네 부터 잘 배우시고 베토벤,모짜르트 정도 치시면 원하는 성과를 내실수 있습니다. 이경우는 열심히 하신단 전제로 3년 봅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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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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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후손은 어떻게 살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방원의 정도전 숙청은 애시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가족은 대부분 해를 입지 않았으며[33] 설사 노비 등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몇 년 후 대부분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삼형제의 맏이었는데 무인정사 당시 둘째 정도복은 한성판윤[34]으로 있었다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다. 셋째 정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도전에게는 경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습의 딸인 경숙택주 최씨라는 아내와 아들이 4명이 있었고 정진, 정영, 정유, 정담이라고 하지만 아들이 3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 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이방원과 싸우다 전사한다.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 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으며[35] 아내 최씨 역시 노비로 전락했다.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이방원은 정진을 판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킨건 물론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시행했다. 태종이 정책 시행이야 그렇다 쳐도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아무 대가도 없이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으며 정적으로만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 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이화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 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으며 애당초 본인부터가 정적에 관대한 면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36] 정도전의 장남 정진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쓰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게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작성한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원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진이 <삼봉집>을 간행할 때 아버지가 직접 저술한 원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의 시문을 모아서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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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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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먹고살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딴 컨텐츠로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느냐가 중요한듯 합니다. 엄청나게 광범위한 인문학을 주제와 소재를 잘 엮어서 과거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오늘날의 인생들에 잘 의미를 부여하며 강의 하고 책을 쓰신다면 이 분야도 불루칩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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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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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흉노 말갈 여진족들은 어느나라가 됬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흉노=훈=Mongoloid 공식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 오늘날 Hungary는 이 Hun이 만든 국가 라는데 Hungary에 가보면 몽골로이드의 인종적 특성은 별로 없다.거란족의 후손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현재 1.중국인, 2,몽골인, 3.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외러시아 인 으로 흡수되어 흔적이 없다물길/말갈이 고구려에 신종(臣從)하였고 발해의 시조 - 대조영 과 그 아버지 대종상 /동생 걸걸중상, 걸사비우가 물길계 인 것으로 보이나 발해 대조영 은 스스로 자기네 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고 하니 우리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가 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계통을 따지려면 하나는 생물학적인 유전/혈통 관계를 짚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분석을 해야 할 것 인데 두 가지 모두 현재의 연구성과가 확실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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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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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전후시기에 노동자들의 근로시간과 실태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세기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공장이나 기계 등 생산수단을 사유한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해 제품을 만들고 자본을 얻는 자본주의 경제가 탄생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고용주와 노동자 관계에서 이뤄지고 있어 노동 환경 정비와 노동자의 권리 같은 문제도 자본주의 경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보스턴대학 사회학 교수인 줄리엣 쇼어는 이런 자본주의 경제를 낳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반 노동시간은 현대보다 짧았다고 말한다. 13세기 영국 농민의 노동시간은 연평균 1,620시간이었다고 한다. 14세기 후반 농민 임금이 상승했을 때 많은 노동자가 매일 일하는 건 거부하고 일반적인 수입을 얻을 만큼 날짜만 일을 했다고 한다. 14세기 영국 노동자의 경우 연간 노동시간은 240일×6시간=1,440시간으로 추정된다.중세 유럽에선 1일 작업은 해가 나고 질 때까지 여름이라면 16시간, 겨울은 8시간이었다. 또 일하는 틈틈이 아침과 점심, 낮잠, 저녁 식사와 휴식이 있었고 노동은 일시적이었다. 이런 휴식 시간은 근로자의 전통적 권리로 인정받았고 농업 비수기에는 풀타임이 아닐 때도 많았다. 쇼어 교수에 따르면 15세기 영국 농민의 노동시간은 연간 1,980시간 정도였다고 한다.또 중세 달력에는 휴일이 많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여름휴가 외에 교회가 설정한 성인 휴식일이 많았다. 이런 휴일에는 교회에서 식사하고 축제에 참여했다. 중세 영국에선 1년간 3분의 1이 휴가였다고 한다. 또 동시대 프랑스에선 52일 일요일, 90일 휴식, 38일 휴가로 설정했다고 한다. 1년 중 180일 그러니까 절반이 휴가였던 것이다. 이는 16세기 잉글랜드 북동부 더럼시에서 주교를 지낸 신부의 수기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자본주의 경제가 도입되기 이전 중세 농경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끊임없이 일했다는 이미지를 받기 쉽지만 이 이미지는 현대 작업 패턴을 역투영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쇼어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의 시간을 노동에 빼앗기게 된 건 자본주의 경제가 태어나 가장 오랜 시간 착취당하던 19세기 중반. 예를 들어 1840년 영국 노동자는 연간 3,105시간에서 3,588시간을, 1850년 미국 노동자는 3,150시간에서 3,650시간 동안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 미국에선 노동 환경을 검토하는 법 정비가 진행되면서 1987년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1,949시간으로 줄였다. 또 1988년 영국에선 제조업 종사 근로자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1,856시간까지 개선됐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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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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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있던 화백회의의 구성원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역사책에는 화백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중국의 〈신당서 新唐書〉 동이전 신라조에서는 "국가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과 의논해 결정한다. 이를 화백이라 했으니 한 사람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으면 그만두었다"라고 했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화백은 만장일치로 의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 같다. 단 화백이란 말의 본 뜻은 확실하지 않다. 이를 신라 고유의 이두(吏讀)식 표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이 '화합하여 아뢴다'(建白)는 뜻에서 취한 한자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상대등에 의해서 주재되었고 중대한 국사는 모두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다만 651년(진덕여왕 5) 김춘추 일파에 의해 국왕 직속의 관청인 집사부(執事部)가 설치되면서 화백회의는 지난날의 권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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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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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라고 하는 인물은 무슨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23년 우광현(禹光鉉)이 세웠다. 이 교단은 기존의 백도교라는 단체를 개명한 것에서 연유한다. 즉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예가 죽자 우광현과 전용해가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암매장했다.나중에 이 사건이 탄로나자 교단명칭을 백백교로 바꾸었다. 교단에서는 전용해를 천부의 아들로 삼고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말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소를 53개소나 설치했다. 이 교단이 사회에 알려진 것은 1940년 교단 내의 살인사건에서 비롯되었다.즉 전용해가 간부 18명과 신도 314명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후 전용해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주하던 중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간부 12명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징역을 받은 자도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교단은 급속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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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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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가 어떤 사이비 종교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23년 우광현(禹光鉉)이 세웠다. 이 교단은 기존의 백도교라는 단체를 개명한 것에서 연유한다. 즉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예가 죽자 우광현과 전용해가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암매장했다.나중에 이 사건이 탄로나자 교단명칭을 백백교로 바꾸었다. 교단에서는 전용해를 천부의 아들로 삼고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말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소를 53개소나 설치했다. 이 교단이 사회에 알려진 것은 1940년 교단 내의 살인사건에서 비롯되었다.즉 전용해가 간부 18명과 신도 314명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후 전용해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주하던 중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간부 12명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징역을 받은 자도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교단은 급속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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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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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사라는건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중앙군의 지휘관이다 이들은 평시에는 임명되지 않고, 비상시 군의 출동이 필요할 때 임명되었다. 이 제도는 북방의 특수지역인 동계(東界)·북계(北界)의 양계(兩界)에 각기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두어졌다. 구성은 병마사(3품) 1인, 지병마사(知兵馬事, 3품) 1인,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2인, 병마판관(兵馬判官, 5∼6품) 3인, 병마녹사(兵馬錄事) 4인이었다.또한 양계 병마사에는 위치가 미상인 고정적인 영(營)이 있었고, 영리(營吏)도 있었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관직의 이름이면서 관제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양계 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처음 설치되었고, 현종 때에는 군사적 기능 외에 행정적 기능이 추가되었다. 정종(靖宗) 초에 6개월 임기제가 정해지면서 지방제도로 확정된 것 같다.1039년(정종 5)에 병마녹사 가운데 1원을 감축하였다. 무신란 이후에는 문반 위주였던 양계 병마사·지병마사 등에 무반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에게 병마판관을 겸대하게 했다가, 1198년(신종 1)에 병마부사로 승격하였다.이후 몽고의 침략으로 이들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양계 병마사 제도의 존재의의가 거의 상실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의 북계 수복과 1356년(공민왕 5)의 동계 쌍성(雙城) 수복 이후 양계 병마사가 다시 파견되었다.그러나 이 때는 이들 지방에 제사(諸使)가 빈번하게 임명,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은 자연히 격하·약화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국이 전쟁터로 되었다. 이에 따라 1362년(공민왕 11)에 동경도(東京道) 등 12도에, 이듬해에는 안동도(安東道) 등 13도에 병마사를 파견, 병마사의 전국적인 배치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양계의 병마사는 그 명칭이 군사적 기능을 나타내고 있는 점, 강력한 지방병력이 배치된 북방 변경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점, 『고려사』 백관지의 ‘곤외(閫外 : 궁궐 밖)를 전제(專制)한다’는 기록 등으로, 흔히 북경(北境) 방위사령부 및 그 최고사령관인 것으로 생각되어왔다.그러나 제도(諸道)의 일반 지방관·안찰사(按察使) 등의 군사행동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지방장관으로서의 행정면의 기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군사·행정 양면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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