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가 어떤 사이비 종교인지 궁금합니다.
백백교는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라고 알고 있는데요.
보통 사이비 종교는 그럴싸한 이유로 사람을 홀리는데 무엇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백교(白白敎)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동학 분파의 신흥 종교다. 약 80여 차례에 걸쳐 신도 350여 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백교 전신은 동학에서 파생한 백도교(白道敎)로 전정운이 1900년 금강산에서 도를 닦고 평안남도 영변군에서 창시하였다. 그는 60여 명 여인을 거느리고 교인 재산을 갈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2] 전정운이 1919년에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에 의해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 둘째 아들인 전용해가 창시한 게 백백교다. 그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이라는 주문을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믿었다.[3]
백백교는 여러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들은 신도 재산 상납을 요구하였고, 딸을 자신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적 학대를 일삼았다.[4]
살인 사건
백백교는 교주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신도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살해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에 일본 경찰에 의해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으며, 경찰에 쫓긴 교주 전용해가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살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가 죽은 후, 일본 경찰은 경기도 양평군 일대에서 시체 발굴 작업을 하였는데, 무려 300여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5] 백백교의 살인 사건은 1940년에 간부들에게 사형 및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이외의 사람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종결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백백교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3년 우광현이 창시한 종교로 전정예의 백도교를 개칭해 세운 신종교입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최제우가 유, 불, 선 삼도의 교리를 종합 , 절충해 동학을 창시하는데 이 동학에서 많은 유사종교가 파생, 백도교가 그중 하나로 나중에 백도교가 분파해 인천교와 백백교로 갈라졌습니다.
1923년 차병간이 경기도 가평에서 퇴폐한 민심을 교화해 광명세계를 실현한다면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뚜렷한 교의나 깊은 사상적 근거를 갖지 못한 사이비종교로서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든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지만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이용하여 교주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였습니다. 조선 말 대표적인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용화교 사건과 백백교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이 집단들은 들어가기는 쉬웠으나 나오려면 목숨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백백교 사건 또한 마찬가지로 교주의 색욕을 채우려고 종교를 이용했으며 수많은 부녀자들을 농락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백교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동학 분파의 신흥 종교라고 합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124
조선 철종때 유.불.선의 교리를 절충하여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 많은 유사종교가 파생되었는데, 백백교 또한 그러한 종교중하나였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에 창궐했던 사이비 종교입니다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했으며 이런 종류의 '주문 수행'은 동학 등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신흥 종교들 사이에선 흔했다고 합니다
대개 무속이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정예(全廷藝)의 백도교(白道敎)를 개칭하여 세운 신종교이다. 우광현은 백도교 교주 전정예가 1919년에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숨기고 전정예의 아들 전용해(全龍海)와 상의하여 암매장하였다.
그런데 1920년 평안남도 강서의 정성희(鄭聖禧)가 그의 아버지 정근일(鄭根一)이 백도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데 격분, 경찰에 고발하자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면서 전정예가 죽은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많은 신도들이 이탈하였다.
이에 우광현은 교명을 백백교로 바꾸고 전정예를 교조로, 그리고 자신을 교주로 하는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1924년 우광현이 교주직을 사임하고 김공연(金公然)이 취임하였다가, 1927년에는 차병간(車秉幹)이 교주가 되면서 본부를 서울로 옮겼다.
그 때까지 실질적인 교단업무는 전용해가 맡아왔다. 이 교는 희대의 살인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전용해는 간부 문봉조 등 18명과 함께 신도 31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40년에 모두 체포되어 12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도 무기 내지 수년씩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도주하였던 전용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 교는 소멸되었다. 백백교는 전용해를 천부님의 아들로 받들고 세상은 멀지 않아 불심판과 물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난소를 찾아야 한다면서 전국 53개소에 임시분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그의 제자 문봉조 등이 10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80여회에 걸쳐 3백여명의 남녀노소 신도들을 살육했다는 사건. 백백교는 근세 우리나라에 유포된 대부분의 신종교와 같이 동학에 근원을 둔 것으로, 동학교의 방계인 백도교(白道敎)의 분파로 탄생되었다. 1899년(광무3)경 평북 영변 태생인 동학군 전정운이라는 사람이 금강산에 들어가 4년 동안 수도하여 도통하고, 그의 부친이 살았던 함남 문천군 운림면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화했다.
신도가 늘어나자 1912년에 그는 강원도 금화군 근동면 수태리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교명을 백도교라 하고 교세를 확장, 1916년경 백도교 교세는 1만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에 교주 전정운이 죽 자 유산 분배 문제로 골육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1923년 교주의 장남 전용수가 경성 도화정에 인천교(人天敎)를 세우자, 차남 전용해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 백백교를 설립하고, 3남 전용석도 경성 도화정에 도화교(道花敎)를 세웠다. 1930년, 강원도 김화경찰서에 전교주 전정운이 오성산중에 그의 애첩 4명을 생매장한 구악이 폭로되어 백도교 간부들이 검거되었다. 이에 장남 전용수는 피신하고 이후 백백교는 지하로 잠적했다.
백백교주 전용해는 무지몽매한 산골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우리 백백교주 전용해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므로, 지금 일본의 통치에 있지마는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주 통솔하에 독립이 될 터이니 교도의 헌금과 기량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의 영직에 임명한다”고 혹세무민하여 그들의 재산과 딸들을 바치게 했다. 교도의 딸 중에 미모의 여자는 자기의 애첩으로 하고 나머지는 간부들에게 불하했다. 신도들이 점차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들은 산간벽지나 광산에서 야음을 틈타 살해되어 암매장되었다.
혼자서 170명을 죽였다는 백백교 간부 문봉조는 자기는 교주의 명령에 따라 했을 뿐이라고 했고, 100여명을 죽였다는 이경득은 사람을 죽이게 된 동기를 신도들의 재산과 정조를 뺏은 비행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당시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백백교 사건은 1935년 7월 강원도 금화 사건이 들추어짐으로 해서 1937년 2월 21일 백백교주 전용해의 자살을 끝으로 해서 세상에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백백교 사건은 일제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은연중 조장한 데서 빚어진 사건이었고, 상당 부분 조작되고 부풀린 보도였다고 보인다. 총독부는 이 사건이 전국에 충격적인 화제로 등장하자 신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이 있는 종교단체를 대상으로 그들을 해체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백교 > 일제강점기인 1920~ 1930년대 가평에서 창궐했던 사이비 종교 입니다.
백백교는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전신은 백도교 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1919년에 배교도 교주인 전정운이 사망한 후,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간의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했습니다.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과 신도 일가족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 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났습니다,.
이 와중에 차남 전용해는 무사히 도망쳤다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을 재건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3년 우광현(禹光鉉)이 세웠다. 이 교단은 기존의 백도교라는 단체를 개명한 것에서 연유한다. 즉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예가 죽자 우광현과 전용해가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암매장했다.
나중에 이 사건이 탄로나자 교단명칭을 백백교로 바꾸었다. 교단에서는 전용해를 천부의 아들로 삼고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말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소를 53개소나 설치했다. 이 교단이 사회에 알려진 것은 1940년 교단 내의 살인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즉 전용해가 간부 18명과 신도 314명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후 전용해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주하던 중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간부 12명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징역을 받은 자도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교단은 급속히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