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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대의 진대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봄부터 가을까지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수확을 한 겨울에 갚게 하는 제도이다. 진은 흉년에 기아민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대는 봄에 미곡을 대여하였다가 가을에 추수 뒤 회수한다는 뜻이므로, 진대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농민에게 양곡을 대여 하는 것을 말한다.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펴나가던 중 194년(고국천왕 16)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크게 상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미곡을 나누어 준 기록이 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 옆에 앉아 우는 자를 만났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부양하여 모셔왔는데 올해는 곡식이 자라지 않아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어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은 왕인 자신의 잘못을 탓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또한 관리들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는 자들를 널리 찾아 구제하게 하였다.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官穀)을 풀어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를 두어 곡식을 진휼 대여하케 하고, 겨울인 10월에 갚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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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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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체서용론이라는 것이 어떤 이론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청나라 때 태평천국의 운동 이후에 일어난 양무운동의 기본 사상. 중국의 유학을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자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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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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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은 언제 조성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낙안읍성 조성 경위를 살펴보면 성곽은 조선 태조6년(1397) 낙안출신,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양해공 김민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흙으로 쌓았고, 세종 6년(1424)되던 해부터 석성으로 쌓기 시작했으며,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약200년 후인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이후라고 합니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형으로, 성곽의 길이는 1,410m이고, 전체면적은 223,108㎥이고,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4군데의 치성이 있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선조들의 우수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은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총 13점의 문화재 (국가지정 10, 도지정 3)를 보유하고 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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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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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공행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1차 아편전쟁(1839~42) 이전 광저우[廣州]에서 서구상인과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중앙정부로부터 부여받았던 중국상인조합.이러한 상회를 '양행'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상인을 가리켜 '행상'이라고 했다.17세기 중엽까지 이러한 상인들이 이론적으로는 13개가 있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늘 4개를 넘지 못했다. 이 제도는 1740년대에 성립되었다. 이 제도에 의해 광저우에 도착한 모든 외국선박은 행상의 감독을 받아야 했고, 행상은 외국상인들의 관세지불과 예의바른 행실을 보장해야 했다. 광저우가 유일한 대외무역항으로 개방되었을 때(1760), 광저우 행상은 외국인에게 차와 비단을 팔 수 있도록 허가받은 유일한 상인이었다. 비록 행상은 관리들에게 많은 돈을 강제로 바쳐야 했지만, 무평전과 같은 몇몇 상회의 행상들은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1720~22년 행상은 피로 맹세하면서 집단가격결정제도를 수립했는데, 이는 중국상인조합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월해관감독(粤海關監督)의 지휘를 받으면서 행상들은 공행을 결성했다(1760). 공행이라는 말은 가격결정을 위한 연합을 의미하지만, 장사할 때 사용되었던 피진 영어(포르투갈어 등이 혼합된 중국의 상업영어)에 의해 코홍(Cohong)이라고 변형되어 상인 일반을 지칭하게 되었다. 행상은 광저우에서 집단적으로 대외무역을 독점했지만, 실제로 개개인의 거래행위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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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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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전개과정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화사상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양무론을 배경으로 한 운동.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초기에는 변경방비 등 군사력 증강에 역점을 두었으나, 점차 교육·실업 등 각 방면에 걸친 개혁운동이 되었다. 1861년 정부가 총리아문을 설치한 후 1865년 총탄·화약·총포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었고, 1868년 번역관을 설치하여 자연과학·기술·역사·국제법에 관한 외국서적이 번역하고 방적, 교통·운송 등의 기관을 설치하였다.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은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청·프전쟁의 패배로 군사개혁에 의한 부국의 달성이 좌절되자, 양무비판론과 함께 정치개혁이 주장됨으로써 점차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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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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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는 양반이 아닌 기생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춘향은 양반인 아버지 성 참판과 기생인 어머니 관기(官妓) 월매 사이에 태어난 양반의 서녀(庶女)이자 천민이라 할 수 있다. 춘향은 양반의 노리개가 되어 결국 버림받고 마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원 고을의 수많은 양반 자제들의 유혹을 거절했다. 양반가의 정실부인이 되어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그런 춘향 앞에 나타난 이몽룡은 춘향에게 그 꿈을 실현시켜줄 구세주처럼 생각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변 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면서부터 겪게 되는 모든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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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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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빈당은 어떤 단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활빈당이라는 당호(黨號)를 확실하게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1886년(고종 23)에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빈당 당호로 소집단의 당적(黨賊)이 일시 활동한 바 있고, 17세기 초반에 저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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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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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이니치코리안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재일(자이니치) 한국인.재일교포를 가르켜 일본인이 부르는 말입니다.얼마나 차별받고 서러움이 많았을까요...ㅠㅠ 대단하고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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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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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불어닥친 한류드라마의 시작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류 열풍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1위는 배용준!1위를 차지한 사람은 욘사마라는 애칭으로 사랑받는 한류 사천왕 배용준입니다!그가 주연한 드라마 '겨울연가'는 일본에서도 사회현상이 될 정도의 인기로 1차 한류 열풍의 계기가 되었습니다.첫 일본 방문 시에는 공항에 약 7000명의 팬이 몰린 적도!지금도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는 최강의 한류 스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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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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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제는 언제 처음 생겨나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의 천황제는 고대사에서 종교적 권위를 가진 천황 중심의 율령제 국가가 형성되었지만, 무가 정권, 특히 에도 시대를 거치며 천황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갔다. 메이지 유신기에 그 전통적 배경으로 한 천황 중심의 근대 국민 국가의 건설이 진행되었다. 1889년 공포된 대일본 제국 헌법은 천황을 통치권의 체현자로 정하고 통치권이 헌법 조항에 근거해 행사되어야 함을 규정했다. 즉 입헌주의의 군주제 국가가 성립되었다. 1930년대에는 권력기구의 하나인 군부가 정치적으로 비대해졌으나 1945년 패전으로 천황제 권력기구 대부분은 해체되었다. 1947년의 일본국 헌법에서는 천황의 권능은 부정되었고 국민주권 아래의 상징 천황제가 형성되었다[1]. 대한민국의 많은 학자들이 우려하는 바는 지금은 상징적인 천황이지만 앞으로 정치의 전면에 대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가 탄생한 이후에 군국주의가 되었고 중일전쟁, 세계 1차 대전, 세계 2차 대전 등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본의 고대 율령국가는 신도 아니면 불교의 터전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왕을 겸했다고 보고 있다(일본에는 천황이라는 낱말이 기록된 오래된 사료들이 있지만[2]). 또한 막부는 쇼군이 천황 또는 왕인 것이다. 따라서 근대에 메이지 유신부터 실시된 군주의 자격을 지닌 천황제는 최초로 볼 수 있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제국헌법 제1조). 근대 천황제 실시 이후, 메이지(明治, 1867~1912년) 천황인 무츠히토(睦仁), 다이쇼(大正, 1912~1926년) 천황인 요시히토(嘉仁), 쇼와(昭和, 1926~1989년) 천황인 히로히토(裕仁)까지 3대, 78년간만 실시되었다. 1945년 패전 이후부터는 상징 천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국가에서 특정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후, 천황제라는 정치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는 알려준다. 겨우 약 80년 만에 정치체제가 바뀐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대일본사에 따르면 2683년 동안 126대에 걸쳐 일계의 천황이 존재했다는 역사는 지나친 신화이며 그러한 역사의식은 천황의 신격화와 다름 아니다. 단언하건대, 일본 역사의 주인은 천황이 아닌 일본 국민들이어야 한다. 일본은 평화 헌법의 해석 법안으로 입헌군주제가 아닌 국민주권의 입헌민주제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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