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박람회기구(BIE)에 대한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BIE는 1928년 파리협약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최초의 근대적 세계박람회는 1851년 영국 런던 세계박람회였고, 그 이후 31개국이 질적향상을 위해 국제기구가 생겨나면서 BIE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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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단오제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전통행사이다 보니, 예전엔 중구난방에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던 행사장인 남대천 둔치를 전면 보수하고 행사장과 장사하는 곳을 완전 분리시켜 놓았고, 행사가 없는 평상시에도 주차를 금지하게 하는 등 강릉시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예전엔 행사 첫 날에만 하던 불꽃놀이가 이젠 첫 날과 마지막 날 밤에 화려하게 펼쳐진다. 단, 2009년 단오제 행사는 2010년에는 [[천안함]] 사태가... 그리고 2015년에는 [[메르스]]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취소된 바 있다. 그러나 5년 후 이번엔 [[코로나19]]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하다가 22년도 코로나 방역지침 완화로 정상운영 하면서 남대천 단오장 방문객이 전년 대비 '''1,041%'''상승하였다.다만 이렇게 문화재로서의 관리에는 철저히 노력하는 반면, 외부 관광객 유치에 치중하느라 지역민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훨씬 지역적이고 친근한 동네 잔치 같은 느낌이었지만, 2000년 중반 이후로는 지역과는 오히려 서서히 유리되면서 5일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중간한 행사가 되고말았다. 덕분에 축제 참가자의 숫자가 급락하고, 이렇게 구매층이 줄면서 판매자도 줄고, 결국 그렇게 축제가 동네 잔치보다는 문화행사에 더 비중이 쏠리게 되었다. 문화제 지정 이전에는 단오장 주변의 교통이 현재보다 훨씬 지옥같았지만 단오 장거리에 강릉시내에서 구하기 힘든 게임 카트리지 등을 판매하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2016년 기준 단오장에는 장사꾼들이 판매하는 품목들이 거기서 거기다보니 그때의 기억하던 강릉사람들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 또한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중국 언론에서 단오를 뺏어간다느니 하고 우기며 한국을 비난했다. 단옷날(음력 5월 5일)부터 열리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시작점은 대관령 산신제다. 허균이 34세이던 1603년(선조 36) 여름,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보았다. 그에 의하면 명주 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괫대와 꽃으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우면 하루 종일 괫대가 쓰러지지 않고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이것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다고 말한 수노(首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말을 듣고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 그 날 가서 보았더니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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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천리나 되는 장성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사]]에서 두 차례,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위치의 [[장성]]. 본래 사서에 기록된 이름은 그냥 장성(長城)일 뿐이고, '천리장성'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 사학자들이 '천리가 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임의로 붙인 이름이나, '천리장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만리장성이라는 이름도 똑같다.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장성'이지만, 후에 '만리'장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고장 중국인들은 아직도 장성이라고 부르며, 그래서 영어명이 'The Great Wall'인 것이다.] 길이를 따져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천 리보다 훨씬 길다. 고려가 쌓은 장성은 길이가 천 리와 비슷하다.사실 '리'라는 단위가 시대와 나라별로 차이가 조금씩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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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독일 소규모의 나치당이 급속도로 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독일이 겪고 있던 대공항을 해결에게 주겠다고 선언을 했고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독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안이었기 때문에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물론 히틀러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볼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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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발달에 있어 천성과 양육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성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하지요. 말 그대로 그 사람 고유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품을 타고 났더라 하더라도 후천적으로 환경이나 양육에 있어 결핍이 있다면 그 선천적인 성품이 모가 날 수가 있습니다. 즉 둘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라고 볼수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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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떻게 조선보다 빨리 조총을 수입 활용하기 시작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문호를 빨리 개방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요. 네덜란드 나 영국 스웨덴 등에서 발달했던 총포를 수입해서 전쟁 무기로 활용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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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시작된 포커같은 게임 문화는 전통문화에 속하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건전하게 친선이나 재미위주로 게임을 하면 서양의 전통문화지요!~~ 그러나 문제는 도박적인 게임으로 모든게 흘러간다는게 전통문화라고 인정하기에는 어폐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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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보면 위에 잔디가 덮혀져 있는데 왜 그럴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잔디가 있어서 무덤의 모양이 오래 유지됩니다ㅡ잔디가 죽거나 없을땨 분봉의 모양이 없어지고 흙이 유실되어 무너지죠... 그래서 잘 관리된 무덤은 잔디가 그 모양을 잘 잡아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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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75년 조선 왕조 후기 때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인 운요호(雲揚號, 운양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양민 학살과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물러간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의 시초격인 사건이기도 하다.봉건적인 막부 체제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근대화 분위기가 장식됨과 동시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침략에 대한 노골적인 망상이 고개를 들면서 이에 힘입어 정한론 (정한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까지 가세하게 되자 침략목적으로 조선에 접근하려고 하였다.이미 1854년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문호 개방을 선포했던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함께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면서 상호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반양(反洋) 정서로 인하여 실패만 거듭했다가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하야 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이를 계기로 조선의 침략을 위해 군선(軍船)인 운요호를 부산으로 밀파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미국 페리제독)사건 때 당했던 방식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늑약(勒約)이라 할 정도로 근대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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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가 실제로 인정받는 역사서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환단고기』 범례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뒤 인쇄했다고 한다.그런데 편저자인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 계연수는 다음 경신년(1980)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제자인 이유립(李裕岦)에게 남겼다고 한다.그래서인지 『환단고기』는 1979년 수십 부가 영인된 뒤 1982년 일본인 가시마(鹿島昇)가 일역(日譯)하고 원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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