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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얼마전 저도 아들 운동회에 갔다가 운동회의 유래가 궁금해서 아하에 물었던적이 있었네요^^운동회의 유래는 일제강점기때 들어온 일본식 교육의 잔재라고 할수있습니다.기분은 나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방식으로 잘 발전시키고 이어나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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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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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족보의 시작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족보를 '보첩(譜牒)'이라고도 한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알기 쉽게 (대부분)부계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으로,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인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그 시초는 중국으로, 제왕연표(帝王年表)라는 황족의 혈통 계보 책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때 현량과 제도를 통한 인재 선발에서 응시생의 가족 내력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한반도에 족보가 처음으로 건너온 것은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라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2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이다. 굳이 조선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의 문벌귀족들도 족보와 유사한 혈통 증명 체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동 권씨 성화보의 제작 과정에서 권제-권람-서거정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자료 수집 및 제작 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이전에는 종법도 보첩도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혈통 기록 방식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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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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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도전은 왜 피살당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간은 원래 배신의 아이콘입니다.나눌게, 가질게 별로 없으면 배신은 가치가 없지만그 대상이 강력한 권력이나 왕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정도전이 꿈꿨던 정치와 이방원이 갖고 싶었던 강략한 왕권 사이에 균열이 오면서 결국...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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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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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목판 인쇄는 언제부터였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과학기술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오늘 날 남아있는 각종 인쇄물 및 인쇄장치는 신라 때부터 발달했던 목판 인쇄술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시기 인쇄술은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여, 종국에는 금속 활자 인쇄술으로 발전하였으며, 대표적인 인쇄물로는 상정고금예문, 직지심체요절 등이 있다. 1234년에 인쇄된 상정고금예문은 서양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보다 200년 정도 앞서는 것이었다. 고려의 활판인쇄기술에서는 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서양에서는 활판을 죄어주는 중치가 사용되어 대량인쇄를 가능하게 하였다. 서양에 비해서 고려의 인쇄기술로는 대량인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술로 인하여 지식층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제지술은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여 종이 제조 전담 관서를 설치하여 중국에 수출하였다. 당시 고려에서 만든 종이는 중국에 수출되어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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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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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어느나라에 고려인들이 살고있는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카자흐스탄 등에 고려인의 후손들이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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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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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통일된다면 서울은 통일 한국의 수도가 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독일의 경우 수도를 베를린으로 정했습니다베를린은 동,서독 같이 존재했던 도시로 도시전체는 동독에 속해있었죠.통일이 되면 서울을 수도로 고집해서만은 안됩니다.북한이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북쪽에 많은 혜택을 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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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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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천주교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도교는 동학운동의 최재우가 창시한 한국의 민족종교천주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하느님을 믿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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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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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3번째 왕비를 궁 밖의 인물로 뽑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면 후궁들중에 출중한 사람을 골라 중전에 올리는게 관례였지만, 문정왕후의 경우에는 달랐다. 후궁들중에 인물이 없었을뿐만아니라 경빈박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는것만은 막아야했기 때문에 궁밖에서 또다른 중전의 후보를 뽑을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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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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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밀어낸 이유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녕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던 터라 얼마 동안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는 우빈객 이래의 말에도,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 태조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를 보고 권좌에 오른 이였던 만큼,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그러나 양녕은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논 것을 비롯하여,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 해, 태종과 원경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7]태종이 양녕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父王)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8]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상술(上述)했다시피, 양녕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9]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10]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세자양보설'과 반대로, 충녕대군이 인격과 학문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세자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우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듯하다. 여러 대군들과 함께 부마 이백강의 연회에 가서 기생과 놀다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사 여기까지만 봐도, 양녕대군의 행적만 보면 그간 태종이 화병이 안 생긴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이상할 따름이다. 양녕대군이 이 분의 아들이었다면, 폐세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됐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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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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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세종대왕 단독창제인가요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창제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동창제가 맞지요!~ 그 방대한 작업을 어찌 대왕께서 헌자 하셨겠습니까?집현전학자들과 같이했던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ㅋㅋ그분들 덕에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한글로 소통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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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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