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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마지노선은 언제 건설되었고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지노선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독일 국경에 설치한 대규모 요새 지대입니다 마지노선의 이름은 요새 건설을 주장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전쟁부 장관인 앙드레 마지노에서 유래를 했습니다 마지노선 건설에는 50억~70억 프랑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30억 프랑만이 사용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 침공을 실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마지노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많지가 않았습니다.오늘날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한계선을 의미하는 관형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1차 대전 서부전선은 개전 첫 한 달을 제외하면 전쟁기간 내내 참호전으로 유지되었고 포병과 기관총의 화력 지원 속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상대의 참으로 돌격해 그것을 점령 사소하는 것이 모든 군사 행동의 기반이 되었고 20년대 군사 전문가들의 사상은 모두 참호 전에 기반하였으며 때문에 참호선을 몇 단계나 강화시킨 거대한 요소에서는 돌격해오는 조건에 맞서 싸우기 최적의 시설물이었습니다 후대에서 항공기와 기계화 부대라는 요소를 간과했다고 비판 받았지만 1920년대 기준으로 항공 및 기계화 부대 모두 초창기 수준이었지요 항공기들은 복엽기, 삼엽기가 주력이었고 폭격 능력의 심각한 제약이 있었으며 기계화 부대는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전차는 여전히 초창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악몽 같은 베르됭 전투 참전자들은 1차 대전 종료 직후부터 마지노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강력한 방어 시설물의 구축을 강력히 주장했지요 배르됭 전투의 주인공이던 필리프 폐탱을 필두로 역시 베르됭의 영웅 중 한 명인 레날 육군 예비역 소령 등 수많은 베르됭 전투 참전자들은 자신들이 몸소 겪은 전훈을 바탕으로 요새와 방어 설비의 강화를 적극 주장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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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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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에서 적벽대전은 어떤 전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적벽대전은 관도대전,이릉대전과 더불어 삼국지 3대 전투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전투이며 삼국지를 안 본 사람도 들어봤을 정도의 명성을 자랑하고 있지요 관도 대전과 이릉 대전은 전투의 규모를 떠나서 유관장 그리고 조조 혹은 제갈량 등의 활약이 크게 없었거나 아예 참여조차 없었던 경우도 있는 반면에 적벽대전에서는 조조 패배, 유관장 제갈량 손권 주유는 승리라는 포지션으로 삼국지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던 일곱명이 전부 참가했던 전투였으므로 가장 유명합니다. 특히 애시당초 유비나 손권이 우세하던 상황이 아니었고 조조가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하던 시기에 조조의 천하통일의 염원이 박살나고 천하 삼분지계가 시작된 분수령과도 같은 사건이었기에 단순히 전쟁의 규모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의 흐름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는 실제 적벽대전이 일어난지 약 1000여 년이 지난 1363년 진우량과 주원장의 대결인 파양호 전투로부터 나관중이 모티브를 얻어서 각색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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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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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미술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상징주의입니다. 이집트 예술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상징들과 그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이집트 예술의 신 프타는 본디 창조의 신이었는데 이 신이 창조한 질서는 모든 예술에 공통되어 건축도 회화도 조각도 그 근저에는 이 법칙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 조형 예술은 우주 만물의 조화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 작품이 아닌데 신전은 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이집트의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 한 거기에는 엄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서게 되지요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고대 이집트 미술 활동의 역사는 모든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합니다.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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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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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지증왕 동시전은 어떠한 기관이였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는 469년 경도의 방리명을 정하여 수도의 행정조직을 정비하였고 487년에는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을 설치 해당 관서로 하여금 관도를 수리하게 함으로써 교통 도로망을 정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도로망의 정비는 물자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여 사방의 물화가 수도에 모이게 되었고 이에 490년에는 서울에 시사가 설치되어 물화 유통의 편리를 도모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지증왕대는 권농정책과 우경의 장려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또 주,군,현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강화되어 공부 수취도 보다 활발해졌죠. 5세기 이전의 신라는 재지 수장층을 통한 공납 지배가 주요한 재정 수입원이었고 이는 해당 지역의 특산물이나 노동력을 중앙에 복속의 징표로서 바치는 체계였습니다. 따라서 그 수요가 부족한 경우도 발생하였고 그러나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지배 영역이 확대되고 국가의 이론적인 통치질서가 성립되면서 공산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분은 국가가 관영 수공업을 운영하거나 지방의 수공업자를 동원하여 조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중앙 관부와 관영 수공업장의 물품 수요 때문에 관시와 관상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던 것이죠. 이에 509년에는 기존의 시장을 정리 개편하여 동시를 개설하고 그 관리 감독 관청으로 동시전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동시전은 시장의 개폐의 시각,도량형의 사용,상인간의 분쟁,고용상품의 조달, 잉여생산물의 판매 등의 업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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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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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전쟁스타일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의 전쟁 스타일은 그의 활약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이성계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준입니다 고려 국내에 침입한 왜국,여진족,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원나라 군벌,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 정벌 당시 요동성을 직접 함락시켜 점령하기도 했지요. 고려조 이후에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입니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공 중 하나로 할 수 있는 황산대첩 때는 왜국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모조리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 하면 고려말 왜구의 침입 항목이 더 많았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항우의 재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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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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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G7 정상회의는 주요 7개국 정상 회담으로 선진7개국 정상회담 또는 서방 7개국 정상 회담은 냉전기 서방을 대표하는 7개 강대국이자 경제 선진국이었던 나라의 정상들이 모여 국제사회의 현안에 대해 연례 회의를 갖는 국가간 협의체입니다. 흔히 약칭인 G7으로 불립니다.산하 협의체로 G7 외교 개발 장관 회의 및 G7 재무장관 회의, G7 보건 장관 회의가 있는데 제1차 석유 파동의 발발로 인해 결정되었으며 1973년 비정기회의 당시는 G5로서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의 5개국이 가맹이 되어 있었고 이후 이탈리아가 1975년 캐나다가 1976년에 각각 가맹하였습니다. 1977년 러시아가 추가로 가맹하여 가맹국이 여덟 개로 늘면서 명칭이 잠시 G8으로 바뀌었으나 2014년 러시아가 불법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의 친러 반군 지원으로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러시아가 G8에서 퇴출당하고 다시 서방국가의 협의체인 G7으로 돌아갔습니다. 동시에 2014년에 러시아 소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회담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고 주요 7개국 정상회담이라고는 하나 유럽 연합이 유럽을 대표하여 비공식 가맹, 정기 참석함으로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 유럽 연합 위원회 위원장을 포함해 참여하는 정상은 총 9명이 됩니다. 여기에 매회마다 회의의 규모와 개최국의 인접성,국제정세 및 현안 등을 토대로 대륙별 지역 강국이나 강소국을 초청하며 다른 국제기구 및 비정부기구의 수장도 참여하여 실제 회의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 7개의 국가들이 지닌 공통점은 모두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공동 가치를 공유하며 선지국 중에서 경제적으로 꼽히는 주요 선진국들이란 점입니다. 군사적으로 대부분 강대국이고 최소 강국이라 불릴 수준은 되며 모두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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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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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왕성은 행성으로 인정하지 않는지?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2000년대 초반까지 초 중 고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태양계의 행성 순서를 이렇게 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에서 제외가 됐는데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천체를 항성 또는 별이라고 합니다. 별 주위를 도는 천체는 행성이라 하고 행성주위를 도는 천체는 위성이라고 하지요. 그 외의 천체는 소행성, 왜소행성 등으로 분류합니다. 명왕성은 몇 년 전까지 태양계의 행성이었지만 지금은 왜소행성으로 정의합니다. 왜소행성이란 행성과 위성을 제외한 천체 중 행성 같아 보이지만 일반 행성보다는 작은 태양계의 외곽 전체를 말합니다.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에서 제외된 것은 2006년입니다 국제천문연맹에서 결정한 것이죠 1919년 창설된 국제천문연맹은 세계 유수한 천문학자들이 모인 단체이자 천체 이름을 명명하고 정의하는 공식 기관입니다. 1990년대부터 태양계 외곽에서 작은 천체들이 많이 발견되자 국제천문연맹은 행성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에서는 태양계 행성의 정의를 태양주위를 도는 둥근 천체로 봐야 한다는 의견과 태양을 도는 천체 중 일정하게 큰 궤도로 돌아야 행성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지요.국제천문연맹에서 내린 행성의 정의는 태양주위를 돌고 다른 행성의 주위는 돌지 않아야 한다. 둥근 모양이고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만큼 질량이 크지 않아야 한다 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에 잡동사니와 같은 천체들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왕성은 태양주위를 돌고 둥근 모양이며 질량이 크지 않아 행성의 정의에는 부합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 기준에 걸렸는데 명왕성의 공전궤도에는 많은 얼음 덩어리 천체들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여덟 개의 천체에는 잡다한 천체들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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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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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은 실존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길동은 실제 인물인데 역사 기록에 전하는 홍길동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처음 충청도 충주 일대였고 일반 도둑들처럼 산중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약한 흔적은 없습니다 홍길동은 정상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지칭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마음껏 활보하면서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행동했다고 하며 이렇게 당상관을 지칭하기 쉬웠던 것은 그의 이복형인 홍일동이 실제로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형의 관복을 입고 당상관을 자칭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이러한 기세 눌린 지방의 권능,이정,유향소의 좌수,별감 등도 알아볼 정도였고 일반 백성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조정은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습니다. 또 조정에서는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고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수는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다가 옥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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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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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어떤 황제로 평가되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당시 알렉산드로 2세의 황태자 였던 알렉산드로 3세와 덴마크의 다우마의 맏이이자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한 큰 아버지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붙여 주었습니다.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고 황태자의 적장자로 태어나 원손→ 황태손→ 황태자→ 황제 즉위 과정을 다 밟은 엄청난 정통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조선의 숙종과 비슷하지요 세계사적으로도 이 정도로 견고한 정통성을 가진 군주는 드뭅니다. 불행히도 그의 능력은 그의 막강한 정통성을 따라가지 못했는데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과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인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했지요.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정치는 아내인 독일제국 헤센 대공국 출신의 알렉산드라 표도로 브나 황후가 맡았는데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승 그레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얻고 권력을 휘두르고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죠 러시아 궁정의 모두가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황후는 친척들의 조언조차 무시했으며 니콜라이 2세는 부인 심기를 건드리기 싫다며 듣지 않았지요 당연히 신하들과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가고 니콜라이 2세 본인은 권력을 휘두르는 라스푸틴을 황후처럼 맹신하진 않았지만 문제는 그가 아내와 충돌하기 싫어서 막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농민 출신인 라스푸틴을 통해 백성들의 실생활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방탕한 행동 또한 백성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고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변의 원성에 라스푸틴을 잠시 유배 보내긴 했지만 그런 조치조차 상황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마저도 니콜라의 2세가 아니라 표토르 스톨리핀이 주도하여 쳐냈는데 황제는 라스푸틴을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스톨리핀이 강경하게 라스푸틴 추방을 요구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러시아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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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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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삼절이 박연 폭포, 서경덕, 황진이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경덕에 대해서는 민간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진이와의 일화입니다 당대 최고 기녀였던 황진이가 서경덕을 존경하였으며 자신과 박연폭포 서경덕을 송도 삼절이라고 칭하겠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지요. 황진이는 송도에서 뛰어난 세 가지로 첫째는 산수 경치에 박연폭포, 둘째로는 화담 서경덕 그리고 셋째 자신을 꼽았다고 합니다. 당시 도학이 높다는 사람의 여색에 대한 태도를 시험해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첫째 유학자인 퇴계는 담담하려고 하지만 무척 고민하는 눈치였고 둘째 화담은 자신의 요구대로 쓸어 안아주기까지 하는데 마치 물건을 다루듯 전혀 관심 없어 보였고 셋째 면벽 9년의 생불 스님이라는 지족선사는 전혀 접근도 못하게 하다가 그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파계하여 돌아 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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