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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항쟁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별초의 항쟁(1270년-1273년)은 고려-몽고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 및 고려조정에 대한 반란의 성격을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삼별초의 난이라고 부르고 원나라에 대항한 것을 강조할 때는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화도에서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반기를 들었습니다. 배중손이 이끌었던 삼별초는 원종의 아우 승화후 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진도를 거점으로 옮겨 남부를 지배하며 항몽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조정의 진압군과 몽골 진압군에게 진도가 함락(1271년)되자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일부세력이 제주도로 옮겨 저항하다가 1273년(원종 14년)에 모두 평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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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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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포도청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시대 치안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치안기관의 명칭이 포도청(도둑 잡는 기관)인 조선시대와 경찰청(언제나 깨어 살피는 관청)인 현대의 관점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줄여서 포청이라고 합니다. 포도대장은 종2품으로 오늘날 경찰청장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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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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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어느시기부터 국민들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정책이 변경되었으며 추진한 대통령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는 제6공화국 노태우 대동령 때인1989년에 이루어졌습니다.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룬 자신감과 올림픽을 통한 국제화가 해외여행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이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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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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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인 불교가 인도에서 유명하지않는 이유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도는 전통적으로 힌두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인도북부와 부탄지역에서 발생한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한 불교가 크게 융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북방불교(대승불교)로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보살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 종교적 신념체계로 자리잡았으며 남방불교(소승불교)로 개인구제를 바탕으로 아라한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는 것으로 미얀마 태국 실론 등으로 퍼져 융성하게 발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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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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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전쟁에서 거란족은 어디서 살고 지금에 어딘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세기 초부터 12세기 초반까지 약 200년간 만주와 중국 대륙의 북쪽을 지배한 민족입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나라 이름을 요라고 했고 1125년 금과 송의 공격으로 멸망했습니다. 요의 야율대석은 요나라가 망하자 몽고로 도망쳤습니다. 그는 요나라 유민들을 모아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서요를 세웠습니다. 서요는 요나라 후손임을 내세워 다시금 번성을 꾀하였으나 1218년 몽고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거란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에 없는 사라진 민족으로 소수민족 중 다우르족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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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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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사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는 청의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당하여 청나라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청으로 끌려간 장남 소현세자가 반청운동의 선봉에 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청나라에 끌려갔던 노비와 여인들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맞서려고 한데 대해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더군다나 10년 가까운 볼모생활로 청의 환대른 받고 청 황실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신을 왕좌에서 밀쳐내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확실하게 기록과 증명은 없으나 정황상 독살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는 소현세자 사후 세자빈 강씨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폐위시킨 후 사사시킨 것이나 소현세지의 세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시키고 자신의 둘째아들 봉림대군(효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만 보더라도 이를 증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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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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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의 무애가는 어떤 내용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효대사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뱃길이 끊어져 하루밤을 동굴에서 묵게 되었는데 하도 목이 말라 물을 찾아서 먹었습니다. 물맛이 달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밤에 달게 마셨던 그 물을 찾아보니 썩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 토해냅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닫게 됩니다. 어제밤에 눈으로 보지않고 마셨을 때는 달콤했었는데 아침에 눈으로 보니 다 토하게 되는구나 모든 것은 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상만 당나라로 보내고 자신은 신라로 돌아와 그때까지 귀족중심이었던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되뇌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노력했으며 해동종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 그대로 나와서 설법하였으며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설법하는 등 무애행(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설법함)을 실천한 큰 스님이었습니다. 요석공주와 합궁으로 설총을 낳았고 손에 술병을 든 모습 등으로 파계승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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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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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석공주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효대사는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의 합방을 위하여 도끼날은 있는데 도끼자루가 없네 도끼날이 도끼자루를 만나 큰 재목을 깎으려하네라는 향가를 지어 부르고 다녔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무열왕은 요석공주를 원효와 합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큰 제목인 이드문자와 화왕계로 유명한 설총을 낳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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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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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왜 호주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세기 경 그리스의 천문학자 푸톨레마이오스는 인도양 남쪽 끝에 미지의 세게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이 미지의 세계가 서구인들에게 발견된 것은 1603년이었습니다. 1603년 네덜란드 탐험대는 호주대륙 북동부에서 남부를 탐험하여 북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지도를 작성하였고 이곳을 뉴 홀란드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200년 동안 호주는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 있다가 1801년 영국의 프린더즈의 제안에 따라 호주의 라틴어 TerraAustralis(남쪽대륙)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호주대륙을 오스트레일리아로 부르게 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전체는 182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호주라고 명명된 것은 한자 영향때문입니다. 중국에서 호주대륙이 처음 알려진 것은 1842년 해국도지를 통해서입니다. 오대리아로 표기하였고 여기에서 1850년 이런 표기들이 일본에서 그대로 인용되었고 187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호자와 대륙을 뜻하는 주가 결합되어 호주로 불린 것이 유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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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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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다'라는 말 많이 쓰는데요, 영락은 무슨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락없다는 조금도 틀리지 않고 딱 들어맞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영낙없다라는 표현은 영락없다의 북한식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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