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이방원처럼 왕권을 강력하게 확립한 왕이 또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있습니다. 세조는 5대 문종이 어린아들 단종을 남기고 죽으면서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고명대신으로 단종을 보위하도록 했는데 이들의 신권이 너무 강하게 조성되는 것을 보고 왕권강화를 내세우며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아 절대 왕권을 강화시킨 왕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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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타종교끼리는 서로 교류를 하는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고 불교 등 종교 갈등이 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5대 종단의 대표들이 모여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는 열린 태도를 갖음으로써 열린 마음으로 타종교를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어서 기독교 목사님이 천주교 미사나 불교의 집회에 가기도 하고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불교 집회나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고 불교의 스님들이 천주교 미사나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는 등 타종교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음으로써 열린 종교인의 태도를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특별히 종교 갈등을 보이지 않으나 종교 내적인 부분에서는 갈등 양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정통과 이단의 갈등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불교에서도 같은 조계종 내에서도 절 주지자리를 놓고 싸우는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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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돌하루방이제주도를 대표하게된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석상이자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상징물입니다. 돌하르방은 제주어로 표준말로 해석하면 돌할아버지가 됩니다. 이 명칭은 근대에 나왔고 그 전에는 우석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옹중석이라는 단어로도 지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어린이들이 돌하르방으로 부르는게 널리 퍼지다 결국 문화재로 지정할 때 돌하르방이 정식 명칭이 된 것입니다. 그외에 불교의 미륵 신앙의 영향을 받아 육지에서 큰 돌을 미륵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미륵 돌미륵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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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오리알이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한쪽에 존재감 없이 있는 것 또는 고립무원의 외톨이 상태를 가르키는 관용어입니다. 이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우선 낙동강 갈대숲 둥지의 오리알이 장마로 갑자기 불어난 물에 떠내려 가는 모습에서 따온 관용구라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낙동강 하구는 남한 지역에서 가장 삼각주 지형이 발달해서 철새도래지로 유명할 정도로 새가 많기 때문에 새알이 떠내려 가는 상황도 있을 법합니다. 또 낙동강은 철새인 오리가 많이 날아드는 곳이어서 오리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리알은 기름기가 많아 비린내만 나고 맛이 없어서 사람이나 짐승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낙동강 주변에 오리알이 방치되었습니다. 또 알려진 것은 6.25전쟁 때 당시 격전지였던 낙동강 전선의 상황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낙동강 남쪽에서 기관총과 박격포를 쏴대면 인민군이 거기 맞고 하나씩 낙동강 물속에 퐁당퐁당 빠지는 모습을 12연대 11중대장 강영걸 대위가 낙동강에 오리알이 떨어진다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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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평가되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의 3차 침입 때인 고려 현종(1019년)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지혜로운 전술로 거란군을 여러 번 공격해 승리했으며 이후 거란은 무력침공을 멈추고 고려와의 화의를 맺게됩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송나라와 전투를 해야하는 거란의 입장에서 후방에 있는 고려가 골칫거리였고 고려 왕이 거란을 방문하는 등 강화 때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으나 흥화진 상류에 쇠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가두었다가 거란의 주력부대가 지날 때 터뜨려 큰 타격을 입혔고 귀주에 도착한 거란군을 근처에 지키고 있던 고려군이 총공격하여 전멸시켜 살아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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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가 왜 유명한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스라엘 왕이었던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늘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라든가 건강하게 해달라는 등 자신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지요. 이를 어여삐여겨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어느 날 두 여자가 한 아이를 안고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다가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억울합니다. 저는 여행 중이었는데 어젯밤 아기를 데리고 이 여자 집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집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여자가 제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우기지 뭠니까? 듣고 있던 다른 여자가 소리쳤어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죽은 아기는 저 여자 아기예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반씩 가지면 되겠군요. 그러자 여행 중인 여자는 울부짖으며 차라리 아이를 주인집 여자에게 주라고 했고 주인집 여자는 그렇게 반씩 나누자고 했어요. 진짜 엄마는 여행하는 여자구나 진짜 엄마면 아기를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그 뒤로 솔로몬의 지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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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어느관직까지 올랐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은 용천 부사를 지낸 허윤도와 첩실인 영광김씨에 사이에 태어난 서자 출신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20대 후반에 잡과인 의과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제수되고 선조의 아들 광해군을 치료하여 선조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주치의로 선조의 건강을 보살피고 말벗을 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1595년 광해군의 병을 치료하자 정헌대부(정2품)를 제수받자 허준을 시기하던 대신들은 의관에게 당상관의 품계를 제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회수를 요청하자 보류를 명합니다. 1600년 내의원의 총 책임자인 수의(정2품) 양예수가 죽자 허준이 내의원의 책임자인 수의가 되었습니다. 1604년 6월 25일 선조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공신을 선별하고 호성공신을 책록했는데 허준은 3등 공신인 충근전량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공신 녹봉으로 전 60결 노비 7인 구사 2인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 받았습니다. 1615년 허준이 77세로 죽자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가 허준에게 내렸다가 회수한 정헌대부 관직을 다시 추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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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제가 물러가자 중국 북쪽에 근거를 둔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 남부지역을 근둔지를 둔 장개석의 국민당이 수차례 평화협상에도 공산당의 4배에 달하던 군사력이 있던 국민당은 대대적 공세를 취했고 공산당 반격하는 국공내전(1946년-1949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전력상 압도적 우위에 있었던 국민당은 공산당의 게릴라전과 각종 선전술 등으로 오히려 공산당이 우세해졌고 결국 국민당은 대만으로 후퇴함으로써 공산화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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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나 차례를 지낼때 향이나 촛불을 켜는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이유는 향의 연기가 하늘에 닿아 조상신들이 찾아오는 길잡이 역할을 위해서 향을 피웠습니다.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향으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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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전쟁 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 1010년 1018년에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 사이의 전쟁을 일컽습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던 두 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특히 세 차례에 걸친 고려 거란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993년 10월 소순녕의 침략 1010년 11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며 요 성종의 침략 1018년 12월 소배압의 침략 등 세 차례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 실패로 국력이 약해져 송나라를 공격할 수 없게 되어 고려 송 요나라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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