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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는 시기는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785년이었고 이 시기부터 1882년까지는 박해시기였고 지금과 같은 성당은 지을 수 없었고 교인들의 사가나 서당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자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신부들은 박해시절에 인연이 있던 지역을 매입하여 성당을 짓었습니다. 이때 지어진 성당은 서울 인천 대구지역이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양식인데 비해 지방의 성당들은 한옥을 개조하거나 한옥식 성당이었습니다. 약현성당(지금 중림동 약현성당 1892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식 성당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고 명동성당(1898) 인천 답동성당(1899) 평양관후리성당(1900) 대구계산동성당(1902) 전북화산성당(1906) 등이 당시에 지어진 성당이었습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 목조한옥성당은 벽돌로 종탑을 증축하거나 벽체를 벽돌로 바꾸는 등 한양절충식으로 개조되고 신축되는 성당들은 모두 이런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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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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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8조법에 대한 내용은 어떤 문헌에 등장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서지리지에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고조선의 8조법 중에서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3개항으로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고 풀려날려면 50만전을 배상해야 한다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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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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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어떤 성과를 냈으며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전했다고 기록됐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최대의 치척으로 꼽히는 것이 봉오동전투입니다. 이곳은 지금은 댐이 건설되어 찾아가도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만 당시에 최대의 전과를 올렸던 독립군의 거점지역이었습니다.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도하여 150명 사망자와 400명의 중상자 200명의 경상자가 나올 정도로 피해를 주었고 우리 독립군의 피해는 불과 4명뿐이었다는 사실은 최고의 전과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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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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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자를 따라 다니면 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는데 가능한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자들의 습관들에 관한 책들이 봇물처럼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습관과 삶의 모습을 통해 생활하다보면 부자가 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습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의 투자를 위한 긴세월에 쌓인 지식과 노하우를 단시간에 습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상황이 똑같을 수 없기때문입니다. 결국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들의 생활습관과 투자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자신만의 투자성향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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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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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는 의병활동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 반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왜군들과 맞서 싸웠고 그들중에는 혁혁한 전과를 이룬 의병장들이 많았습니다. 조현 고경명 김덕령 곽재우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논공행상을 정할 때 임진왜란을 물리친 공은 자신이 피난을 가서 명나라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하면서 공을 선조 자신과 자신을 수행했던 신하들에게 있다고 하여 공신들로 후한 상을 내리고 의병들의 활동을 폄훼했습니다. 이에 함께 싸웠던 신하들과 의병들은 비분강개하였으나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40여년 뒤에 일어난 정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들의 활동을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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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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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통제사는 어떤 직책인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후기 서반의 종2품 관직으로 삼도수군통제사로 통칭되며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겸직하여 통제사 통수 통곤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이순신장군이 전라 경상 충청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것이 시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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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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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삼재란 어떤걸 말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재란 인간이 9년 주기로 맞이하는 인생에서 가장 안촣은 시기를 말합니다. 9년이 지나가는 시점부터 3년 단위로 별의별 재난을 겪는다고 하여 삼재팔난이라고 합니다. 삼재에 해당하는 각각의 해를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라고 칭합니다. 삼재 1년차는 들삼재로 삼재 2년차를 눌삼재로 3년차를 날삼재라고 부릅니다. 천살 지살 인살의 안좋은 기운이 이때 몰린다고 하고 자신뿐만아니라 부모님 배우자 등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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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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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에서 김종필은 왜 영원한2인자 라고 칭할까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한 주축세력들은 육사 8기생들이었습니다. 육사 8기 선두주자가 김종필이었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박정희 군부독재를 지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향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밖에 몰랐고 절대로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종필은 2인자일 수밖에 없었고 노태우 김멍삼 김종필의 3당합당 때도 김영삼이 대토ㅡ령후보가 되었으니 김종필은 멱시 2인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종필은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가 붙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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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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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에서 양쪽이 동원한 병력은 얼마나되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45년(보장왕 4)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당나라군대 와 벌인 공방전입니다. 당 태종 이세적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폐위시키고 보장왕을 등극시킨 것에 대한 명분으로 고구려에 처들어왔습니다. 비사성을 함락시키며 처들어오던 당군은시성에서 전투가 전개되면서 주춤하게 되었고 당 태종은 안시성을 둘러싸고 고연수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당시 성을 공격하는 무기인 포거와 총거를 이옹하여 안시성을 공략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60여일 만에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만들어 안시성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결국 토산이 무너져 제대로 공격도 못한채 황급히 도망치듯 당으로 돌아게 됩니다. 중국측 문헌에 의하면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10개성을 빼앗고 4만명 이상을 전사시킨 반면 당은 2000명밖에 희생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려나 당 태종 이세민도 양만춘장군의 화살에 눈이 맞아 애꾸가 된 기록도 전해지면서 당우 피해도 상당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당나라는 육군6만 수군 4만 총 10만명이었고 고구려는 고연수 고혜진이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야지에서 대패하여 3만 6천명은 당군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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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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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세조)은 왜 석보상절을 편역했나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의 명에 의해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최초의 책입니다. 석보상절의 석보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의미하고 상절은 종요로운 내용은 자세히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 쓴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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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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