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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보성이 왜 서편제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보성소리(강산제)는 보성출신의 박유전이 창시했고, 강산제라는 명칭의 유래도 그와 관련된다. 강산제라는 명칭은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이 대원군 앞에서 심청가를 부르자 대원군이 “네가 강산 제일이다”라고 극찬한 데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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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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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나라나 자기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단군신화 속에는 우리 민족은 신의 후손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사상이 담겨 있으며'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홍익인간'이란 고조선의 건국이념을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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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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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은 언제부터 불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 기독교 음악)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1970년대 이후 세계로 확산된 기독교 음악 또는 그러한 음악 운동을 통틀어 일컫는다. 가사에 기독교 믿음을 직간접적으로 담고 있는 현대 대중음악의 한 장르. 찬송가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찬송가는 예배에 사용되는 전례용 음악이고, CCM은 전례에 사용하지 않고,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담은 대중음악이다. 더 확실하게 정의하자면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국내.외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자료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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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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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여포는 정말 멍청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여포는 힘이 세고 궁마술에 능숙하여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사람들은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兔)”고 감탄하였다. 진궁도 여포는 장사로서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한다고 장막에게 말한 바 있다.진등은 여포가 용맹하기만 할 뿐 무모하고 거동이 가벼워 조속히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조 역시 여포에게는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이리 새끼 같은 야성[낭자야심, 狼子野心]이 있다고 하였다.중국사에서 여포의 총평은 용맹하고 무예에 뛰어나나 지략이 없고 무식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색욕이 넘쳐 항상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고 평가한다.--자료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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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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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퍼스트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온걸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일단 레이디라는 단어의 어원은 로드(Lord), 즉 주군의 여성형으로, 귀족 신분의 여성으로써 기사가 모셔야할 여성을 말했다. 레이디는 한국에서는 그냥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 여겨지나 원래는 훨씬 권위있는 호칭이었다. 유럽권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호칭 중 하나가 Our Lady(프.Notre-Da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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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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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의 기원은 먼가요? 왜 별똥별이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유성은 별똥 또는 별똥별이라고도 하며, 유성체가 지구 대기권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돌입하여 밝은 빛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유성은 지구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과는 다른 것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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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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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의 종류는 어떠한 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엽전(葉錢)은 놋쇠로 만든 옛날의 주화이다. 대체로 둥글고 납작하며 가운데 네모난 모양의 구멍이 있다. 최초의 엽전은 중국 진나라 때 만들어졌으며, 한국에는 996년 성종때 최초로 건원중보를 주조하였다. 그 후 상평통보·팔방통보·대동전 등이 만들어졌다.--자료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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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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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국이라고 불리우던 탐라가 몰락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高), 양(梁), 부(夫) 세부족이 능력과 관계없이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앉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왕이 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결국 나라는 망하고 고려에 복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내 원의 지배를 받는 수모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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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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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라는 칼이 살상용 무기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철을 두드려서 만들었다. 전체 길이는 74.9㎝이다. 그 중 손잡이 내지 연결부를 뺀 칼날 부분이 66.5㎝이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굴곡진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용도와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명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칠지도의 연결부에 주목해 이를 칼이 아닌 창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1873∼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金)으로 상감(象嵌)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칠지도(七支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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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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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채 전투는 어떠한 전투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1010년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는 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三水砦戰鬪)와 통주성전투(通州城戰鬪)로 구분된다. 삼수채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고려 강조(康兆)의 군대가 거란군에게 패하였다. 통주성전투는 삼수채전투의 승세를 탄 거란군이 통주성을 공격하여 이루어진 전투로,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홍숙(洪淑) 등의 고려군이 성을 끝까지 고수하여 고려가 승리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통주전투(通州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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