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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축의금 문화는 과거 품앗이 문화가 이어져온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축의금, 즉 부조는 과거 결혼잔치에 참석자가 국수 등의 음식을 들고 가던 풍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원래 결혼 예식은 신부의 집 마당에서 이루어졌기에 결혼은 마을 공동체의 잔치였으며, 품앗이 처럼 음식물을 상호 부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출처: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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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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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어떻게 진화했습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때 송나라에서 아악이 수입된 이후 당시의 음악은 아악과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당악 및 우리 고유의 음악인 속악 곧 향악의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아악은 주로 제사에 쓰였고, 당악은 주로 조회(朝會)와 연향(宴饗)에 쓰였으며, 향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역대의 이 모든 음악은 장악원(掌樂院)이라는 음악기관에서 관장하였는데, 1908년 12월 27일 포달(布達:궁내부에서 일반에게 널리 펴 알리는 통지) 제161호로 궁내부(宮內府)의 관제가 개정, 반포될 때 장악원의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궁내부 장례원(掌禮院)에 부속되었고, 악사(樂事)를 책임지는 상위직의 직계로 국악사장(國樂師長) 한 사람이 있었다.이때에는 이미 양악(洋樂)의 군악대가 해산된 뒤여서 이를 그대로 궁내부에 흡수하여 각종 신식 의전과 빈객 접대에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악대의 악장인 양악사장(洋樂師長)과 구별하기 위해 우리 전통음악을 관장하는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비록 직명에서이지만 국악이라는 이름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광복 직후 재야의 국악인들은 이전의 아악사장(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결성하였다. 이 대한국악원의 명칭에서 국악이라는 말이 다시 사용되었다.또, 1950년 1월 16일 국립국악원의 직제 공포로 구 왕궁아악부는 국립국악원으로 개칭되어 국악이라는 말이 확립되었다. 아악이라는 말은 재래의 궁정음악 일부에 국한되지만, 국악은 아악과 민간에 산재한 민속음악 일체를 포괄할 수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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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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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예절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정집, 사찰, 게스트하우스 출입시 신발을 벗습니다. 간단한 인사(목례가 기본)가 가장 정중한 인사입니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두 손을 사용합니다. -출처:서울시공식 관광정보 웹사이드
학문 /
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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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또는 지금의 어느정도 직급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늘날의 동원사단장~군단장 급인데 조선시대의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상설 무관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적인 파워나 예우는 중장~대장 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일개 목사보다는 당연히 이쪽이 직급도 높고 끝발도 세다.-출처:나무위키
학문 /
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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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파라(Margaret Farrar)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Margaret Petherbridge Farrar는 미국 언론인이자 New York Times의 최초 십자말 풀이 편집자였습니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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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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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이라고 하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태왕손 이현(李鉉, 1922년 12월 3일[2] ~ 1996년 2월 17일)은 의친왕 강(義親王 堈)의 여덟째 아들이자, 이태왕(李太王)의 손자이다. 생모는 수경당 김씨(이름은 창희)이고, 아명은 경길(慶吉)이다. 호(號)는 산남(山南)·남촌(南村)·주포(周浦).-출처:위키백과
학문 /
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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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은 자체적으로 화약기술을 개발 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가 기밀로 화약제조기술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원나라가 고려 사람, 최무선에게 비법을 알려줄 리 만무했지만, 벽란도에서 원나라 사람들과 접촉하며 그들이 전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통해 염초 제조법을 익힌 최무선은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여보는 등 밤낮없이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고 1375년, 20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자신만의 염초 제조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출처:KB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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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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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은 무슨 단체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1949년 6월 5일에 조직했던 대한민국 반공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출처:위키백과
학문 /
역사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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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에서는 어떻게 다른 신호를 줄 수 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봉수는 봉(횃불)과 수(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전근대 국가의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방법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주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락국의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연원이 깊다. 거화를 통한 통신 방법의 확정, 전국 차원의 봉수선로 설정, 시설 확충 및 요원 배치, 관장 기관의 설립 등 국가의 통신체계로 확실하게 정비된 시기는 고려 중엽이며 이 틀은 대부분 조선시대로 이어졌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문 /
미술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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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사에 나오는 신한공사라는게 뭐하는 기관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한공사(新韓公社, the New Korea Company)는 1945년 11월 10일에 설립한 미군정의 산하 기관이자 공기업으로[1], 토지 및 재산을 관리하던 기관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존재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승계 기관이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구 동양척식회사의 재산 중 38도선 이남의 재산만을 실질적으로 관할하였다. 초기에는 신조선회사라 했다가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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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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