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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관이름중에서 청과처는 무슨차이가 있는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대 한국은 행정기관을 부/처/청으로 분류합니다셋다 조금씩 관련이 있기 때문에 셋 모두 설명하겠습니다부(部)=ministry(英) / department(美)중앙행정 기관의 단위 중 제일 높은 단위 이며제일 높은 공무원인 장관이 직접 우두머리역할을 합니다.기획재정부, 외교부, 보건복지부 등이 있습니다처(處)= Ministry정부부서 중 국무총리 소속으로서 여러 부에 관련되는 기능을 담당하는 참모적 부서입니다우두머리는 처장이지만 가끔 장관이 직접 담당 하기도 합니다현재는 인사혁신처, 식약처, 법제처 등이 있습니다처와 부는 영단어가 같을 정도로 역할이 비슷하고 둘다 예산권과 법령 제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정권이 달라지면 처에서 부로 승격하거나 부에서 처로 격하 될 수 있습니다.실제로 작년에 통일부를 격하하려는 시도가 있었죠그러니까 그냥 현재 정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는게 편할 듯 합니다.청(廳) :장관 밑에 소속된 부서 .예산과 인사권이 상부에 예속된, 말 그래도 일부 부서에 부과한 내청과특수한 업무를 맡아서 예산과 인사권이 분리된 외청으로 나뉘는 데요내청은 대통령령이라고 해서 대통령이 거의 맘대로 만들 수 있는 임시직 같은거고중앙정부부서는 외청만 해당됩니다. 그래서 법령제정권도 외청만 가지고 있습니다.외청에는 경찰청, 국세청 등이 있으며 외청밑에 내청이 세워질 수도 있습니다외청은 항상 상위의 "부" 가 따로 존재하며 그래서 법령도 상위 부 명의로 제정합니다뜻이 매우 광범위 해서 영어의 administration , agency, office, service 전부가 청으로 번역되기도 하죠청장과 처장은 둘 모두 차관급으로 분류되며 일단 계급적으로는 같지만독립적인 인사권과 예산권이 있는 외청의 청장이 내청의 청장보다 높게 대우받고,외청청장과 처장사이는 그때그때 다르다고 합니다물론 장관이 담당하는 일부 처의 경우에는 청장보다 높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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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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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미상궁은 어떤 역할을 하였고 언제부터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미란, 독살을 막기 위해서 밥을 미리 맛보는 작업을 뜻하며조선 초기부터 이미 기미라는 단어가 쓰여졌기 때문에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단어가 생겨 났는 지는 알 수 없지만이름은 좀 달라도 영국, 중국 등등 거의 전세계에 비슷한 직책이 있었기 때문에한반도에도 옛부터 비슷한 직업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기미상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상궁(30년 이상 일한 궁녀가 받는 칭호)중에서도특히 신뢰받아서 독살방지라는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상궁이었습니다.그래서 중전의 기미상궁, 왕의 기미상궁등 여러 기미상궁이 있었고대부분의 기미상궁은 그 사람이 어릴때 부터 함께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그리고 오래일했으면서 상사?의 신뢰를 받았으니당연히 대부분은 제조상궁(또는 큰방상궁, 상궁 중 최상위 지위)급 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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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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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어떤 인물이며, 무슨 업적을 이루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덕태자는 19세에 이미 고모인 스이코 덴노의 섭정이었는데요당시 덴노의 외척 겸 자기 할아버지인 소가노 우마코라는 대신이 엄청나게 밀어줬기 때문입니다.당대 최고의 귀족을 뒷배로 둔 만큼 파격적일 정도로 일을 밀어 붙일 수가 있어서불교를 포함한 해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호류지를 비롯한 절도 많이 세우고헌법과 계위를 만들어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습니다.하지만 스이코덴노보다 일찍 죽어서 태자면서도 천황이 되지 못했는데오히려 이런 비극성이 드라마틱 해서 일본에선 대대로 숭배/연구 되었고 현대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해외문화를 받아 들이기 위해선 당시 기술력으론 당연히 한반도랑 교류 할 수 밖에 없었기에백제와 일본의 교류는 엄청 빈번하게 이루어 졌고그래서 스이코 덴노가 당시 일본 최고의 사찰이었던 아스카데라를 완성하자 백제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사절단을 보냈으며 그래서 아좌태자가 쇼도쿠태자와 만났다고 합니다그런데 아좌, 혜총과 혜자는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인물이기 때문에 실존여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그나마 아좌는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생각하면 이름이 뭐던 태자 한두명은 오고갔을 것"정도로는 인정 받는데혜자는 생뚱맞게 고구려 사람이 튀어나와서 더욱 의심받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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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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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단기, 양력, 음력 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 밑으로는 반말을 쓰겠습니다 양해바랍니다.양력= 태양력: 태양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날짜세는 방법) 이라는 뜻지구가 타원형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태양도 매일마다 하늘어디를 지나가는지가 달라지니이 움직임이 한바퀴 돌아서 같은 자리를 돌게되는 것을 1년의 기준으로 한 달력1년이 300일이던 한달이 15일이던 태양이 기준이기만 하면 다 양력이지만이미 1580년대에 1년이 365+X일 이라고 정확하게 계산 되었기 때문에기원전 45년에 로마제국이 만든 율리우스력이 4년마다 윤년(하루추가)을 넣은 달력을만들었다. 하지만 오차가 있어서 점점 날짜가 틀어지다가결국 1582년 10월 4일 목요일에 당시 교황그레고리오가 "내일은 10월 15일이다!"라고 말하면서달력을 개정, 윤년이 무조건 4년마다 오는게 아니라 예외가 있는 년도를 추가한 그레고리력을 만들었고이게 세계 표준이 되었다그 밖에도 1월1일이 항상 일요일 이고 1년에 13개월이 있는 국제고정력이나화성에 사람이 살때 필요한 달력이라는 컨셉으로 만들어진 다리우스력 등의 양력이 있다.서양에서 서력기원(자세한 설명은 후에)을 자주 써서 양력=서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양력은 역법이고 서력은 기년법으로 서로 다른 규칙이다음력=태음력: 달을기준으로 하는 역법달이 차고 지는 모양의 변화를 기준으로 한"달" 을 세는 역법(1개"월" 도 그래서 월입니다)일단 아시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삭망월)이 약 29.5일이기 때문에한달이 번갈아서 30일/29일으로 하며 한달이 12개 있으면 4계절이 한바퀴 돌기 때문에1년=12달 로 정했다. 다만 이렇게 하면 1년이 354일이 되기 때문에2,3년마다 윤달이라고 하는 13번째 달을 넣어서 오차를 해결한다.한국은 전통적으로 이런 태음력을 써왔으며, 그래서 설날이나 추석같은 전통은 모두 음력으로 세었다.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으로 양력이 도입된 후에도 태음력을 버리지 않고현재까지 양력과 음력을 같이 쓰는 몇 안되는 나라로 남아있다.이슬람에서도 자기들 만의 음력역법이 있다고 한다서기=서력기원: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서력 기원(=1년)으로 삼는 기년법(올해가 몇년인지 세는 방법)서기 525년,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라는 자가 예수가 탄생한 해를 알아냈다고 주장한 것이 시작으로14세기쯤에 이미 유럽 전체가 쓰는 규칙이 되었다고 한다.그가 무슨 증거로 예수님 탄생년을 측정 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그래서 현대에는 예수님의 실제 탄생년은 기원전4~6년 쯤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세계적인 달력기준이라서서력기원을 바꾸지는 않았다.단기=단력기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 했다고 전해지는 날을 단기1년으로 삼은 기년법조선 성종 16년(=서기1485년) 편찬된 《동국통감》의 해석을 따라 단기1년은 기원전 2333년으로 정했으며1909년, 홍암 나철이 대한 제국 시절 창교한 대종교라는 단군을 모시는 종교에서 단기 사용을 주장했는데이게 일제강점기 시대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딱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유행하게 되었다.그후 대한민국 초기, 대략 1950년도까지 단기가 널리 사용되었지만아무래도 세계적인 기준은 서기이기도 하고, 단기이론 자체가 구멍투성이 였기 때문에그리고 민족주의가 시들시들해졌기 때문에 단기는 점차 사라져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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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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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왜 북벌을 고집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촉나라에는 세워질 때 부터 바다가 없었습니다삼국 중에서 가장 약한 세력인 만큼 힘을 기를 시간을 얻기 위해서 일부러 시골 산지에 있었기 때문이죠그리고 남쪽의 남만은 원주민이 날뛰는 원시의 땅이라서 맹획등을 통한 간접통치로 만족하고 있었고동쪽의 오나라는 그나마 친한 나라라서 여길 공격하면 동맹도 안남아서 금방 망하게 생겼고서쪽은 지금 땅보다 더 험한 산간벽지라서 진출 해봤자 아무것도 못얻으니북쪽이 유일한 선택지 였습니다 위나라의 평지를 먹어서 농업력을 키워야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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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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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동서양마다 미적 기준이 변화해 왔는데요, 미적 기준은 인간의 본성인가요? 아님 후천적인 학습의 결과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둘 다 입니다유치원 생들도 미추를 구분할 수 있다는 연구가 아주 많이 있는 만큼외모에 대한 호불호가 유전적인 레벨로 존재하고 있는건 확실 합니다.짝짓기 상대던 생존경쟁 상대던 상대방의 능력을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쪽이 생존에 더 유리하니까 시력을 통한 판단 능력이 진화된 거죠하지만 미추의 기준은 사회화 과정에서 어느정도 변할 수 있습니다.아프리카에는 목긴게 미녀라면서 목에 링을 계속 채워서 목을 기르는 부족이 있고중세 중국에는 발을 작게 만들기 위해 후천적으로 기형이 되게하는 전족 문화가 있었던 것 처럼요.무슨 "자손 만대 번창하는 궁극의 외모"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고사회성 동물인 인간으로썬 사회에 잘 받아들여 지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니까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미추 기준도 어느정도 바뀔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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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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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크리스마스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크리스마스는 본래 로마의 태양신 축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한국의 동지 처럼 12월 중 낮이 가장 짦을때 지금부터 낮이 길어지니까 태양신이 부활한다며 축제를 벌인 것으로이 "부활" 부분이 예수님 부활과 닮은 점이 있어서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된 후에 예수님테마 축제로 바뀐 것 입니다 산타클로스의 원본은 성 니콜라스라는 3세기 기독교 성인입니다.물건 기부를 자주 하고 다녔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선물을 나눠주는 축제가 따로있다가비슷한 시기에 있던 크리스마스랑 합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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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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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교서관과 홍문관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 둘은 활용된 시대도 역할도 좀 다릅니다.교서감(또는 교서관)은 경적(經籍유교 경전)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 · 인신(印信 : 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종교로써의 유교에 관한 기록을 담당하는 부서 였습니다.태조 1년에 만들어져 정조5년에 폐지되고 외규장각이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홍문관은 문서의 관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세조 9년에 설립된 당시에는 그냥 정부문서를 보관하기 하는 기관이었지만성종때 언론역할을 부여받아 점점 커져서 자문연구기관이 되었습니다.그후 대한제국때 까지 남아있었다 폐지됩니다간단히 정리하자면 교서감은 제사같은 종교적 기록 담당이었고홍문관은 공문서 담당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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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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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철학중 묵자의 묵가는 어떤 사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매우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을 통해서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자는 느낌이었습니다.교상리 라고 해서 모두가 동등하게 재화를 나누자고 주장했죠.묵가는 "愛"를 중심으로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면 세상의 고통도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마치 기독교의 아가페와 비슷한 부분이 있고,간디의 비폭력 운동처럼 비공사상(공격 하지말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묵가는 제자백가에 뽑힐 정도인 만큼 뛰어난 인물 이었지만"나라를 1천개로 쪼개면 서로 싸울 힘이 없어져 평화로워짐"이라던가"4~5쌍의 부부의 공동육아가 이상적인 가족이다" 라던가현대인이 봐도 여러모로 무리수 같은 주장을 많이 했기 때문에백성들 사이에선 인기가 있어도 지배계층 에게는 아예 이단 소리를 듣고 다녔으며결국 초심을 잃어버리고 비공사상을 버리고 국력증강을 추구하거나상동사상이라면서 현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습니다.이런 현실 타협이 도움이 되긴 했는지 진나라는 세워지기 직전까진 묵가를 많이 등용했지만진시황이 중국 통일에 성공한 직후, 그 유명한 분서갱유때 탄압을 받아 결국 학파가 망하고 말았습니다.남은 사상과 자료들을 도가쪽에서 받아들여준 덕분에 기록이 좀 남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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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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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조조는 동탁토벌이후 왜 유비를 죽이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엔 그 누구도 유비를 라이벌로 보지 않았습니다.군사력? 물론 장비와 관우의 무력이 뛰어나긴 했지만제대로된 책사도 없고 의용병(말그대로 무기만 든 농민) 몇백명 정도만 끌고다녔습니다권력? 유비가 가진 권력은 그냥 지방 유명인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도장비가 돈좀 있는 지방이고 관우가 유명한 무장이라서 있는거라 유비 본인은....황실 친척이다? 유비는 황족 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정도로 방계중에 방계라서아예 사칭해도 문제 안될 정도의 혈통이라 사칭한거 아니냐는 설도 있을 정도 였습니다.심지어, 삼국지 정사 기준으론 동탁토벌전에서 유비군의 활약 자체가 안나옵니다.그냥 "조조군에 있었다가 져서 공손찬한테로 튀었다" 정도로만 적혀있죠관우가 적장을 단칼에 배어서 술이 안식었다느니 하는 활약은 전부 야사나 연의에 나오는 겁니다이런데 누가 이 사람이 촉나라를 세울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제갈량도 그때 유비를 만났으면 등용 안됬을 겁니다.조조 입장에선 그냥 시골의 황족(자칭)이 몇백명이나마 병력(허접함) 데리고 찾아와 준건데고맙긴 하지만 하찮은 사람이니 힘들여서 죽일 이유도 없었죠.장비나 관우같이 탐나는 장수들은 그냥 유비 채로 먹어버리는게 편하기도 하구요물론 서주 대학살 때 쯤이면 주목 한두번 쯤은 해서 작게나마 세력이라 할만해지긴 하는데그때 유비는 여포를 홀라당 속여 넘긴 공으로 좌장군자리를 받았습니다.자기 도와줘서 좌장군씩이나 하게 해줬는데 그걸 바로 죽인다?서주 대학살로 흔들린 명분을 천자모셔서 겨우 채웠는데 그걸 다시 날려 먹는 짓이죠 그 후로도 여러 세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좀 거슬리는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결국 제갈량을 얻고 입촉하기 전까지 유비는 떠돌이 군소군벌 중 좀 유명한 사람 정도에 불과했으니조조입장에선 견제할 이유를 못느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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