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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유대인 중동분이신데 어찌 백인의 그림들이 돌아다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인의 얼굴이 학계의 지식과 정반대로 알려지는건 흔한 일입니다한국만 해도 단군 초상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위인 얼굴이박정희 독재정권이 자기들 맘대로 근거도 없이 그린 것 이죠유전자 검사는 커녕 사진도 없는 고대인물의 초상화라면남아있기도 힘들지만, 남아 있더라도 왜곡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도 하구요불교가 원산지인 인도보다 동아시에서 더 융성한 것 처럼기독교 또한 원산지인 중동 보다는 유럽지방에서 더 성공했으며어차피 예수님 초상화나 그런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그냥 자기들 상상대로 예수님 모습을 만들어낸 겁니다.그리고 비행기는 커녕 자전거도 없던 고대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은자기와 다른 인종은 보기는 커녕 소문도 들은 적 없으니예수님 또한 자연스럽게 유럽적인 모습이 된 거구요.보지도 듣지도 못한걸 사람얼굴이라고 주장할 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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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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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을 가면 공항에서 지문과 사진을 등록하고 검색대를 통과 하는데요.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모든 국민의 지문을 등록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민주주의 국가중에선 진짜 유일하죠.이런 한국도 인권문제로 2003년에 외국인 지문 수집을 그만 뒀는데 일본은 왜 아직도 그러냐면....딱히 알려진건 없습니다.일단 테러방지니 인구 관리니 뭐니 하고 있긴 한데먼저 그만둔 한국의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범죄율이랑 지문은 별 상관 없고9.11테러 이후 비슷한 짓을 했던 미국의 관광산업과 외교가 엄청난 타격을 받은걸 생각하면참 이상한 행동이죠일단 관련 이야기를 좀 하자면대부분 나라에서 지문은 범죄자것만 따로 보관하는데1952년에 일본이 외국인등록법을 만들면서 제14조는 일본에 1년 이상 재류하는 한국인이 거주등록을 할 때 반드시 지문을 날인하도록 의무화했었습니다당연히 한국인은 다 범죄자 취급이냐면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1980년대엔 아예 각잡고 지문날인 거부운동이 일어나서3년마다 한번->5년마다 한번->1987년 폐지 되었었는데2007년에 부활 시켰습니다.이때도 반발이 심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아직도 유지되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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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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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을 위한 대부업체같은 게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물론 있었습니다. 고려 중기부터 농장에서 장리(長利)라 하여 10두에 3두 내지 5두의 고리대금업을 했단 기록이 있고.사채란 단어자체가 고려시대에 생긴 거에요 공공기관의 빚(채)인 공채가 아니라개인끼리 사적인 빚(채)만들어서 사채인거죠조선의 대출 제도는 급채(給債) 방채(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등 다양하게 있었다고 전해지며대출이자를 ‘이식(利息)’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고 합니다대출 알선 전문가인 흥리인 또는 식리인 이란 전문직업도 있었다고 하죠조선은 거의 대출 왕국이라 승려, 사대부 서얼 가릴 것 없이 어느 계층이나 대출업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금융업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이자도 맘대로고 추금도 맘대로 인데체면이라도 걱정해야 하는 공채완 다르게 사채는 아예 검계같은 불법 조폭들이 관리해서빌렸다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염왕채(염라대왕사채)라고 불렸다고 하고사채업자들이 날뛰어서 걱정이란 기록이 가끔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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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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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와 뮤지컬의 같은점과 다른점의 차이를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페라는 정통 클래식 창법과 악단을 활용하는 오래된 형식이고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사건같은 것을 다룹니다.그리고 99% 노래로만 진행되죠. 춤은 잘 활용되지 않습니다뮤지컬은 비교적 새로운 형식으로 연극의 중간중간에 노래파트가 있다는 느낌이며팝, 락 클래식 등등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쓰고 소재는 뭐든 상관 없습니다.그리고 춤이 빠지면 섭할 정도로 자주 쓰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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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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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운하나 천연항구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사막지형사막이 아프리카에만 있는건 아니지만 아프리카의 사막은 세계3대 사막중 하나이면서대부분이 모래사막이기 때문에 공사하는게 엄청나게 힘듭니다.단순이 생각해 봐도, 진흙으로 성만드는 것 보다 모래성 만드는게 더 어렵자나요?그래서 모래성 만들때 물뿌리는거고2 해상운송의 힘을 실감 할 수 없음아프리카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홍해나 나일강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아프리카엔 배가 다닐 곳이 없습니다.강이나 해변가가 있어서 배를 쓸수 있으면, 그냥 있는 물 이용하면 되고없으면 애초에 배가 뭔지도 모르는 거죠3 식민지배운하는 말그대로 지형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엄청 비싸고 힘든 일입니다.현대 한국에서도 사대강이 어쩌구 하다가 계획을 버린 것 처럼대부분 나라는 운하를 만들 돈이 없어요.식민 지배 당하는 땅은 말할 것도 없고.그나마 동서양 무역 항로를 1/3 수준으로 만들어주면서이미 홍해가 있어서 비교적 파내야할 땅이 좁은 수에즈 운하 정도가"식민 지배 제국들"이 투자를 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거지다른 땅은 운하를 파낼 이유도없고 돈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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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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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시기에 위스키를 유사길로 불리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냥 평범하게 서양에서 배로 옮겨서 수입했구요냉동기술도 없고 배는 99% 바람타고 움직이는 배였기 때문에지금보다도 엄청나게 비싸서 양반,부자들만 즐길 수 있었습니다옛날엔 녹음기 같은게 없거나 너무 비쌌기 때문에외국어의 네이티브 발음을 듣는다는건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 했고그래서 대부분 언어가 외국어를 자기네식 발음으로 바뀌었습니다프랑스를 불란서 라고 부르고커피를 가배라 부르는 등등단어를 실제로 들어본 사람이 한자 중에서 최대한 비슷한걸 찾아서 적으면그걸 읽은 사람은 원래 단어를 모르고 적혀진 한자만 읽으니까이런식으로 바뀌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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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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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탄산음료가 약국에서 탄생된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약국에서 약만 팔던건 생각보다 얼마 안된 일이고의약의 발달도 생각보다 한참 느렸기 때문에1810년대부터 독극물인 비소가 색이 좋다고 염색약으로 쓰던게결국 독약인 것이 인정되 판매금지 된 것이 1960년대일 이고1850년대에는 아편(마약 말하는거 맞습니다)을 아기 수면제라고 팔기도 했습니다.탄산음료 정도면 실제로 소화 효과도 있고 먹을 순 있는 물질이니 그나마 건강한거죠애초에 탄산음료가 몸에 나쁜건 탄산 때문이 아니라 설탕이나 인산 같은 첨가물때문입니다그때 당시 약국에서 만들어진 탄산음료는 현대로 따지면 탄산수에 약초를 넣은 거라서이상한 짝퉁 레시피가 아닌이상 건강에 별 문제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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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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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사 강의를 듣다 보면,, 유라시아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식입니다.애초에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 다른 대륙인게 아니라그냥 대륙이 너무 커서 동쪽이랑 서쪽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교류를 안한 결과문화적으로 차이가 많아져서 임시로 나눈 것이기 때문이죠.특히 유럽지방은 지들 기준으로 자기들 보다 동쪽인 나라 전부를 아시아라고 불럿기 때문에한때는 그리스조차 아시아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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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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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전투는 정말 300명이 페르시아 군을 막았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물론 그것은 영화적 과장입니다역사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당시 그리스군 구성중스파르타 완전시민(=엘리트전사)이 약 300명, 외부 자유면 1천명과펠로폰네소스, 테살리아, 아카디아 동맹 파견병 총합 3천명으로 약 7300명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여기에 기록에 잘 안나오는 노예병이나 기록의 오차를 감안하면 9000명 이었을 수도 있다고 하죠그리고 덤으로, 영화 300은 역사학적으론 엄청나게 욕을 먹는 작품으로작중에서 무슨 마왕군 처럼 묘사되는 페르시아 군은실제론 당시엔 보기드문 인권존중과 노예폐지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제국이었다고 합니다그리스,특히 스파르타가 죽을 기세로 반발한게 노예제 폐지당하기 싫어서란 설이 정설이죠다만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군에 병력수에 비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것은 사실이며얼마나 끈질겼었는지 어지간하면 적군의 시체라도 예우를 보이던 페르시아군이레오니다스의 시체는 이례적으로 모욕했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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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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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오호대장군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실은 게임이 아니기 떄문에 무력이 세다고 진짜로 1천명을 상대로 혼자서 이길 수도 없고애초에 절대적 평가기준도 없으니 무력만으로 장군을 뽑을 순 없습니다.그리고 사실 오호대장군이란 반쯤 소설가 나관중이 창작한 설정입니다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그런건 존재하지 않았고다만 "4명"을 선정한 사방장군이란게 있는데, 오호대장군중 조운을 빼면 됩니다.관우, 장비는 아예 유비의 의형제니까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고마초는 한때 유비,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한 강력한 군벌출신이고황충은 하우연을 상대로 승리했었죠물론 황충이 제일 경력이 딸려서 혼자서만 관리 처벌권인 가절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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