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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은 왜 성골의 마지막 여왕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골과 진골을 가르는 기준이 현재엔 남아있지 않아서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뭔가 순혈같은 느낌의 구별이었다면 사라지는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중세 유럽의 예를 들어보면진골성골 없이 왕족은 그냥 왕족인 유럽에서 조차순혈 유지 하겠답시고 근친혼을 반복하다가합스부르크 왕가는 말도 힘들어하는 주걱턱이 되고영국왕실에는 혈우병이 유전되기 시작했어요그런데 유럽 전체에 비하면 훨씬 작은 반도 속 한 나라인 신라에서 왕족을 성골이니 진골이니 구분했으니 순혈이 남을 수 있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었겠죠현대처럼 인공수정이 있는것도 아니고 정자주 조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자식을 보려면 그냥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시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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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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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폐위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종본인은 아무 잘못도 문제도 없습니다문제가 있다면 문종이 단종을 늦게 얻은거하고 바보같은 이유로 일찍 죽은거 정도?부모님 장례치르다 자기가 죽다니..참...수양대군은 야망이 그득한 능력자라는 건 세종도 알고 있는 듯한 묘사가 많습니다.하지만 조선건국 이래로 형제 숙청을 안한 왕이 없을 지경이다 보니까수양대군을 숙청할 수가 없었고, 수양본인이 만약 별생각이 없었어도문종이 엄청 딱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니까 반정생각이 안날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단종은 묘호도 못받은 노산군이었다가 후대에 너무 불쌍하다고 단종이란 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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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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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시대 음서 제도에 대해 불만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뭐... 음서로 뽑힌 사람이 나보다 실력이 떨어진다면질투같은건 느꼈을 수도 있지만음서 자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중세시대니까요, 전 인구를 상대로 시험이나 조사를 할 수있는 현대가 아니니까전세계 대부분나라의 관리들은 개인적 추천으로 뽑았습니다과거시험 같은 제도가 일찍 개발된 조선이랑 중국이 특이한거죠과거도 행정력 부족, 변별력 부족 등의 이유로뇌물이나 가문이 반쯤 정식 채점기준이 된 상태 였기 때문에조선 중후기 부터는 음서랑 별 다를게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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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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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731부대 책임자를 엄벌하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단 전범으로 잡아 넣긴 했지만세균전 관련 중요데이터를 준다는 말에 넘어가서 책임자 대부분을 몰래 풀어준겁니다731부대는 보통은 인권문제로 불가능하거나 너무 효율 떨어지거나 해서못할 실험도 식민지인간은 사람이 아니란 논리로 마구잡이로 했었고그래서 독특한 자료가 많았기 때문에 미국도 그걸 원한 거에요혹시 몰라서 말하지만미국은 정의의 나라가 아니고, 세계2차대전은 식민지 해방전쟁이 아니에요그 크기가 굉장할뿐, 본질은 나라끼리 서로의 욕심 때문에 싸운 흔한 전쟁.그러니 미국도 당연히 자기 이득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소련을 막기위해 한국을 독립시켜 준거고소련을 막기위해 일본의 A급전범중 많은 작자들을 사면 혹은 무죄처리 했죠A급 전범은 지휘관 급이고, 당연히 영향력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많았으니까요마찬가지 이유로 한국의 친일파들도 처벌 거의 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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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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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자료가 왜 없는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기술이 실전되는건 매우 흔한 일입니다.기술직의 지위가 올라간건 현대부터에요중세, 아니 근대 초반부 까지만 해도 사농공상은 전세계 공통인식이었습니다장인은 있으면 좋지만 귀하진 않은 소모품 취급이었죠.한국에서도 자격루 복원은 실패했고중국만 해도 명나라시절 세계를 여행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큰 배인"보선(寶船)" 이란걸 만들었었지만중국땅이 너무 커서 바다까지 진출할 필요를 못느꼈기 때에 설계도가 원정끝나고 한세대만에 실전되기도 했습니다.더군다나 당시의 인쇄기술은 해봤자 활자정도니까요안그래도 종이가 귀한데 그림을 그린다면 낭비기도 하고 복제가 거의 불가능 해져서 기록이 남게될 확률도 줄어드는 겁니다.그래서 대부분의 기술은 글로만 기록되었고, 그래서 세세한 디테일은 후대의 상상에 맞겨졌죠다음으로, 현대인에게는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님의 상징이만사실 거북선이란 이름은 태종시절부터 나옵니다.고려의 과선, 여말선초의 검선처럼 창칼을 배에 박아서 침입자를 막는 설계가 전부터 있었고 이것이 태종때 연구되어 거북선이 되었는데 하지만 그냥 실험삼아서 만든 프로토타입에 불과 했는지 아니면 명나라따라서조선도 바다엔 신경 끄고 살아서 그런건지태종 실록에 한두번 언급된 뒤로는 등장이 없었다가이순신 장군때 다시 등장했죠.자세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태종때와 같은 물건인지 그냥 동명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진왜란 중에도, 그 후에도 계속 개조되었기 때문에거북이 모양인거 빼면 공통점이 없는 여러 버전이 존재했고그 중에서 이순신장군님이 쓴 배가 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거에요이순신 장군님도 장인이 아니라 장군이니까 따로 설계도 남길 생각 안했고조선왕조실록은 "왕조"기록이니까 당연히 무기설계도 같은거 안그렸으니까요심지어 거북선은 사실 철갑선이 아니란게 현재 학계의 정설입니다거북선철갑주장은 일본측 기록에만 나오는데일본의 기록은 "내가 진건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과장도 많고철갑이란게 등껍질전체가 철인지, 가시정도만 철인지,그냥 너무 당당해서 철같다고 한건지 알 방도가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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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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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수정실록, 일기는 뭐가 다른 건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승정원일기는 말 그래로 왕이 한일 전부를 적기 때문에"왕이 발가락 아프다고 함" "왕이 오늘 개 피곤하다고함" 이런것도 적혀있는말 그대로 일기 입니다. 그래서 역사기록으로 남길부분만 남기는 과정이 필요한 거에요보통 실록은 이하의 과정을 따라서 편찬합니다1 사관이 사건이 터질때마다 사초를 기록한다2 승정원(왕의 비서실 같은 곳)에서 각종 문서와 왕명에 대한 기록을 모은다3 왕이 죽으면 실록청을 세워서 그 왕에대한 실록을 작성한다3-1 사초랑 승정원 일기를 모은다음 최대한 중요한 부분만 살려서실록의 초고인 초초를 쓴다3-2 초초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후 재편집해서 중초를 만든다3-3 실록청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마지막으로 첨삭검열한다이것이 정초=최종완성판 이며 정초를 5권 준비해서 각 지방에 보관한다수정실록하면 보통 선조수정실록을 말하는데실록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쓴, 왕조차 편집할 수 없다는 기록인 것이 특징이지만아무래도 사람이 쓴것이니 만큼 주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그래서 실록이 내용이 맘에 안드는 붕당은 항상 생기는데그 붕당이 모종의 이유로 정권을 주도하게 되면그런 의견을 반영해서 새 실록을 만들면서도"이렇게 수정한 것도 누군가에겐 편파적일 수 있다. 그러니 옛날 버전도 남긴다"라고 최소한의 변명을 했고 그래서 원판하고 수정판이 둘다 남아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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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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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대통령제가 처음 도입된 국가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거로 우두머리르 뽑는거 라는 의미로 질문하신거면고대 아테네시절 부터 있었지만프레지던트 라는 단어를 최초로 쓴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입니다.당시에는 미국사람들도 "이제막 독립해서 왕이 따로 없으니까 투표로 뽑자"라고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고그래서 그냥 대표 라는 뜻으로 president라고 불렀지만워싱턴 본인이 딱 2번 임기 하고선 "왕이 될 수 없다" 라며 바로 은퇴,그 후로 비교적 짦은 기간동안 투표로 뽑히는 나라의 우두머리 라는 뜻의 president가 정립된 것 입니다그래서 미국엔 president가 항상2명이에요연방 대통령하고 상원 임시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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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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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들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런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애초에 작품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는 발상이 18세기 부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그전까진 예술품은 특정 가문이 대대손손 물려받는 것이었기 때문에대부분은 이름이 따로 없었습니다. [가문 위인 xx의 초상화][xx 사건을 그린 그림] 이런 식으로 불렸죠하지만 예술품 거래가 발달하면서 [무제]가 너무 많으면 관리가 불편해지니까무제작에도 각자의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어요.그 유명한 모나리자도 화가가 아닌 후대가 붙인 이름이구요이런 이름붙이기도 좀 유명한 사람이 유명한 작품에 남겨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인터넷은 커녕 전보도 없던 시절이니, 유명하지 않은 사람 주장은 퍼지질 않았죠 )관심을 덜받은 작품들에는 이름이 남지 않았습니다이 당시 인상파나 초기 추상화들은 해석의 편리성이나 거래활성화를 위해서제목을 남기곤 했지만추상화 계열이 점차 발달하면서 제목이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이름을 안붙이거나 작품16번 같은 중립적으로 붙이는 것이 유행했고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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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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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사마의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조조 아들이 바보였기 때문입니다.조조는 사실 따로 생각하던 후계자가 있었지만 전쟁통에 사망해서조비가 후계자가 되었는데이 조비란 인간이 진짜 못난 인간이었기 때문에강을 이용해 버티던 오나라는 둘째치고, 제갈량만 남았다는 촉한도 못이겼습니다.아버지가 수명 다될때까지 노력한 끝에 무려 관우까지 정리해 줬는데 말이죠.그래도 조조때 꿀땅은 다 차지한 위나라라서 잘 버티고 있었지만조비가 즉위후 6년만에 사망, 그 다음인 조예도 제대로된 후계자 못남기고 사망이때 조조의 직계 혈통은 완전 끝났고, 조예의 양아들 조방부터는권위도 전통성도 안남은 허수아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 자체가 흔들렸습니다당시 위나라는 황제의 친척인 조상파와 개국공신 사마의파로 나위었는데요249년 고평릉사변을 통해 조상파가 몰상당해서 사마의파가 나라를 장악합니다.그리고 멀쩡한 사람이 지휘하는 위나라는 정말 굉장해서촉도 오도 다 박살내버렸고라이벌이 다 사라져서 평화가 찾아오니까 이제는 우두머리를 갈아치워도 될꺼 같아서사마씨가 조씨를 밀어내고 황제가 되는 겁니다재밌는건 위나라 망하는 과정이 한나라 망할 때랑 똑같다는 거죠1 황제 유약함2 그밑에 능력있고 전공많은 사람이 있음3 능력자가 활약하니까 황제 무쓸모 론이 나오기 시작4 공->왕->황제폐위->건국/즉위 함조조가 했던 일을 사마의 아들 사마소가 똑같이 했고그래서 삼국통일까지는 위나라가 있었지만어차피 이미 한참 전부터 사마씨의 나라였기 때문에진나라(또는 서진)이 삼국을 통일했다 라고 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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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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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국가중 가장 오래된 국가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가의 기틀에도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에....이름으로 따지자면 기원전 3000년 부터 이집트 였던 이집트구요정부로 따지자면 아이슬란드가 874년에 건국되었었지만 1380년에 덴마크에 점령당해서 재독립 한게 1918년이니 애매하니까1274년 이후 계속 시국인 바티칸 시국이 제일 오래됬다고 할 수 있지만바티칸은 도시국가...의회로 따지면 산마리노 공화국일 겁니다 몇번 점령 독립을 반복하다1631년이후로 독립을 유지해 1815에 국제적으로 나라로 인정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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