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도 서로 유학을 보냈나요?
오늘날의 유학생 제도는 아니지만 삼국시대에도 국가간 서로 문화와 제도를 주고 받았으며, 따라서 학문, 기술, 불교, 유교 지식도 왕래했습니다. 반면 기록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당나라 유학입니다. 삼국은 서로 보다도 당을 상대로 한 외교, 유학생을 파견하는데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640년 같은 해 당의 국학에 학생을 보냈습니다. 삼국은 서로 전쟁을 반복하였으며, 장기 체류형 학문 교류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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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해서 궁금한점 질문드립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 권력 공백 상태에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신군부가 실권을 잡은 점입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고, 5.17 계엄 확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했습니다.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전국적으로 저항했는데, 특히 광주는 민주화의 열망이 더욱 거셌습니다. 특히 광주는 재야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를 제압하지 않고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군부는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광주 지역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 많은 광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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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영토를 다스렸는지 궁금합니다.
당의 통치제도의 기본은 중앙의 3성6부와 지방의 주, 현체제였습니다.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어 각 주와 현을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화북과 강남은 둘다 제국의 내지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주현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하지만 변방에 대해서는 내지와 다르게 통치하였습니다. 서역, 북방, 주변 민족에 대해서는 도호부와 기미정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도호부는 당나라 변방의 이민족 지역의 속령을 군사 행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둔 최고급 통치 기관입니다. 예를 들어 안서도호부 안북도호부, 안남도호부, 북정도호부 등을 두어 주변 지역을 통괄하게 했습니다. 또한 기미정책은 복속 지역을 직접 완전 통치 않고 현지 수장에게 일정한 자치를 주면서 간접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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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재산 몰수 당연한것 아닌가요?
친일반민족 행위로 취득한 재산은 환수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법적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 침탈과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은 국가에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러일전쟁 개전 시점부터 광복할 때까지 친일 행위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친일 재산으로 규정하고, 해당 재산을 국가 소유로 귀속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상속, 증여받은 재산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2011년 친일재산 국가 귀속 조항에 대해 7대 2로 합헌을 결정하였습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친일파의 모든 개인 재산을 무조건 몰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일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었다면 반드시 환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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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왜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나요?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오닌의 난 이후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자 스스로 자신과 영지를 지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와 농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였기 때문에 전쟁은 곧 생존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게다가 신뢰할 만한 중앙 권력이 없기 때문에 각자가 독립적인 군사력을 가진 상황에서 상대방의 약속을 믿기 어려워, 방어를 위해 군대를 늘린 것이 오히려 전쟁을 확대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각 다이묘들은 서로의 약속을 믿기 어려웠고, 동맹과 배신이 반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개인적 욕심만이 아니라 중앙 권력의 부재, 경제적 경쟁, 불안한 안보 상황이 결합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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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은 어디로 흩어졌나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로 강제 이주, 신라에 투항, 북방으로 이동 등 여러 방면으로 흩어졌습니다. 당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막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대거 중국으로 이주시켰는데, 보장왕을 비롯한 2만8천호가 강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신라로 투장하기도 했는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 부흥운동을 주도한 안승같은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이 가운데 당나라 영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한 집단은 거란족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고구려, 말갈 유민들과 함께 탈출하여 698년 동모산에 발해를 건국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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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정확해질까요?
사회적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정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초두 효과라고 해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떤 인물, 기관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얻은 정보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처음에 유능하다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면 이후 행동에도 그 틀에 맞추어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확증 편향을 가진 사람들은 믿고 있는 생각과 일치하면 긍정적, 반대되면 과소 평가합니다. 긍정적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사소한 실수라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한가지 두드러진 측면에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체 이미지를 평가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회적 평가는 새로운 근거를 찾으면 재평가할 수 있지만 초기에 형성된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려면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고 당시의 맥락과 현재의 기준을 함께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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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호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전혀 없었나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해외 이주는 주로 한반도와 가까운 간도, 연해주, 일본이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미주 이주를 시작하여 미국, 멕시코, 쿠바 등지로 흩어져 이주하였습니다.호주는 언급한 지역에 비해 매우 희박하지만 업지는 않았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무렵, 존 코리아라는 이름의 조선 청년이 17세에 상하이를 출발하여 호주로 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본명과 출신 지역은 모르겠으나 1894년 호주로 귀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단순히 호주에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호주에서 정착한 최초의 조선인 시민권자입니다. 아마도 그는 상하이에서 생계와 일자리, 또는 선교사나 외국인과 인연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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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현지 문화나 전통 예절을 미리 숙지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데 그런 자료는 어디서 구할수 있나요?? 좀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여행지의 현지 문화를 이해하고 여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한민국 외교부의 해와 안전여행 홈페이지에 국가별 기본 정보, 안전 유의사항, 현지 법규와 여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 시설 방문 시 복장, 그리고 사진 촬영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마약, 음주 관련 법률과 법적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지 대사관과 문화원을 통해서도 그 나라의 종교, 명절, 전통 의상, 인사법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국가의 공식 관광청을 방문해도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지역별 축제, 종교 시설 방문 예절, 대중교통 이용법, 팁 문화 등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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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신라의 골품제 같은 엄격한 신분제가 덜 알려져 있나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국가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를 정비했습니다. 특히 신라는 골품제와 같이 지배층은 내부적으로 별도의 신분제를 두었습니다. 고구려 사회는 대체로 왕족, 귀족, 평민, 노비로 나뉘었습니다. 고구려도 지배층 내부의 신분제도 있을 거으로 추정합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지배층도 신분의 정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간접적으로 묘사한 흔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는 신라처럼 문헌이 많이 전해져 내려 오지 않아 신분제의 세부 규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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