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사전에 등록된 친일파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민족문제연구소에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첫째 일제의 국권 피탈 과정에서 협력한 매국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 등 일제의 침략에 동조, 협조한 매국노입니다. 즉, 1905년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과 같은 을사오적은 대표젹인 친일 매국노입니다. 두번째로는 35년동안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고위 관료, 군인, 경찰 등입니다. 예를 들어 중추원 고문, 참의, 고위 경찰 판검사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들입니다. 일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을 확대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인들이 지원병, 징용 등에 나갈수 있도록 선전 선동한 학자, 교육자, 예술가, 기업인, 언론인 등입니다.언급한 안상호는 이완용 치료, 대정친목회 평의원 등을 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더라도 그가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그의 활동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아 인명사전에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정도에 따라 증보판에 포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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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공부 재미있네요..그런데 왜이리 우리 역사중에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은지..
질문자의 생각에 많이 공감합니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지만 조금만 달랐으면 역사의 큰 변화가 있었을 장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와 신라가 함께 발전했다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정치, 문화적 공간이 더 오래 유지되거나 현재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실학 사상을 정책에 반영하여 상공업과 신분제 개혁을 더 일찍 추진했다는 근대화의 충격을 더 잘견뎠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근대화에 더 적극적이었다면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고 자주독립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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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후손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친일매국노의 자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에 비해 부유한 생활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일부 친일 인사와 후손들은 친일의 대가로 축적한 재산과 능력을 바탕으로 토지, 재산, 교육,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하거나 망명 생활로 소진하고, 해방 후에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친일파의 후손들의 그들의 조상들의 재력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을 이용한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친일반민족해위자가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환수하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어도 환수 실적이 미진한 것이 안타까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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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에는 왜 왕위 쟁탈전이 그렇게 자주 일어났나요?
무열왕의 즉위와 삼국 통일 전쟁으로 무열계 직계가 집권하면서 전제 왕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혜공왕 이후 무열계 왕위가 무너지면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여러 진골 귀족들이 왕위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신라 상대에는 성골 귀족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진골 귀족 출신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 계승 대상자가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중대에는 무열계의 강력한 왕권으로 인해 내물계의 다른 가문들은 계승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약화되고 혜공왕 이후 무열계의 왕위 계승권이 무너지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내물계의 많은 진골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 것입니다. 또한 골품제의 폐쇄성으로 정치 참여가 제한되고, 농민 몰락과 지방 세력의 성장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도 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왕위가 안정적으로 세습되지 못하고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교체가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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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로 시끌벅적한데 친일파의 기준을 알고 싶어요
친일파의 기준은 크게 세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닏. 우선 일제 침략에 협력하여 국권 피탈에 앞장선 매국노입니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 합방 조약 등에 협력한 인물들입니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에 동조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 통치 기간에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한 고위 관료, 경찰, 군인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중추원은 총독부의 친일 조선인 자문 기구로서 중추원 참의와 같은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인물은 친일파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입니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인적 물적 수탈을 강화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협력한 학자, 종교인, 언론인, 예술가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는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나가도록 독려한 학자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우리 민족 또는 다른 민족에게 신체적·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준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단순한 협조자 전체가 아니라, 역사적 책임이 크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중심으로 선정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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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된 수감자는 누구였나요?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는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형사범을 포함해 많은 수감자에게 사형이 집행된 곳입니다. 그러나 관련 사형 기록이 대부분 유실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된 사람 가운데 확인 가능한 기록도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펒 있지만 처형된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날 누가 처형되었는지 실제 처형이 있었는지조차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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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는 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게 됐나요?
발칸 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동유럽, 남유럽, 서아시가 만나는 교차로로 강대국들의 세력 확장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슬라브족, 게르만족, 라틴족, 튀르크족,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과 가톨릭·정교회·이슬람 등 여러 종교가 좁은 지역에 공존하게 되었습니다.특히 19세기 오스만제국이 약화되면서 각 민족이 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는데, 1,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지만 서로 영토와 민족이 정리되지 않아 충돌이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슬라브족이 남하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슬라브족을 지원하면서 발칸은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 문제로 확대된 것입니다. 결국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은 1차 대전의 촉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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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와 분무기는 누가 언제 어떻게 처음으로 만들었나요?
전기 다리미는 1882년 미국이 발명가 헨리 W 실리가 발명했습니다. 이 전기 다리미는 저항 가열 방식으로 열판에 니크롬 선을 감은 발열체를 넣어 전기를 통해 열을 발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무게가 너무 무겁고 전기 보급이 제한적이라 바로 대중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1926년 뉴욕의 엘덱이 최초로 상업용 전기 스팀 다리를 출시했고, 이후 스팀 기능이 현대식 다리미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분무기는 특정 발명가에 의해 발명되었다기 보다는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발전했습니다. 1860년 대 프랑스에서 향수용 분무기가 개발되어 손으로 압력을 가해 액체를 미세하게 분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1888년 미국 줄리어스 프루덴이 노즐에 대한 특허를 받아 의약품, 살균제 분사에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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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개명을 하여 한국인 행세를 하였나요?
광복 이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송환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일부는 한국에 잔류하여 생활하였습니다. 잔류 유형은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배우자, 한국에 사업 기술 기반이 있던 상인이나 기술자들, 귀환 과정에서 기회를 놓치거나 귀환을 포기한 사람, 전쟁 범죄 등으로 일본 귀환을 꺼리는 사람 등이 한국에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차별과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꾸거나 일본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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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의 자유의 여신상과 색이 달랐다던데 진짜인가요?
자유의 여신상은 본래 붉은 빛 또는 황동색이었습니다. 1885년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보내졌을 때 자유의 여신상은 구리판으로 덮여 있어 반짝이는 구리색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는 공기 중 산소, 수분, 이산화황 등 대기 오염 물질과 반응해 산화되며 색이 변하는데, 처음에는 구리색이지만 점차 흐릿한 갈색, 그리고 청록색으로 됩니다.따라서 현재 처럼 구리가 산화되어 자유의 여신상은 청록색을 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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