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수하신 왕은 누구 인가요? 장수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으로 82세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장수 비결은 평소 검소한 생활과 절제된 식사를 했습니다. 영조는 김치나 시금치 등 채소 반찬으로 단출하게 식사했으며, 술 대신 생강차를 자주 마셨다고 하네요.영조는 산증이라는 질환을 앓았는데, 이는 소화 불량과 전ㄹ비선 질환의 복합 증상이라 하는데, 몸을 차게 만드는 음식을 피하고, 소화기관을 보강해 주는 음식과 약을 섭취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미리 병이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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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예전에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됐었잖아요?그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연합국들이 독일이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4개국 점령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부 지역을, 소련은 동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베를린도 4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어 동서베를린으로 나뉘었습니다.그런데 냉전이 격화되자 1949년, 서부 지역의 점령국들은 독일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수립했습니다. 반면, 동부 지역의 점령국인 소련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수립되어 동서독으로 분단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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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생긴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126년 인종의 장인이자 외조부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척준경의 배신으로 이자겸의 난이 진압되었으며, 이자겸은 영광으로 유배에 처합니다.그런데, 이자겸이 이 곳에서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를 먹고 이를 인종에게 보냈는데 여기에 '굴비'로 써 보냈다고 합니다. '비록 내가 유배와 생선이 맛있어 보내지만 너에게 보낸다. 그러나 굽히는 건 아니다.'라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런 이유로 굴비라는 생선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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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외교정책 가운데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반정의 이유는 광해군이 명나라의 은혜를 잊고 후금과 친하게 지내는 반명 행위와 관련았습니다. 따라서 서인들은 명나라에 성의를 다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명나라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후금의 복속 요구를 거부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후금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정묘호란이라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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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종은 왜 4군 6진을 개척하였는지 궁금하고 토관정책은 무슨 정책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고 이 곳에 토관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 지역의 토착민을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토관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연고가 있는 지역에는 지방관으로 파견하지 않는 상피제를 그 지역에는 작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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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양반들이 주도하는 사회였는데 왜 조선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늘어나는데 사회는 혼란하여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동요됩니다. 그 이유는 양난을 거치면서 정부 재정이 곤란해지자 재정 확충을 위해 납속, 공명첩 발행, 그리고 군공 도 양반 신분을 늘렸습니다. 게다가 경제적 부를 축적한 부농 등이 호적을 매입하거나 위조하고, 서얼들도 소청을 통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킵니다. 그러나 양반은 권력을 잡지 못한 양반이 낙향하여 향촌에 머물거나 몰락한 양반은 농민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19세기 세도정치 시기 왕권이 약화되고 세도 가문이 득세하자 탐관오리들의 수탈은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몰락한 농민들이 정부와 탐관오리에 저항하면서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 등 농민 봉기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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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을 왜 대군이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창대군은 선조의 적자로 광해군 3년(16011) 대군으로 책봉됩니다. 그러나 대북파 일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으로 자백하게 하고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반역죄로 사사되었으며, 영창대군도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결국 그 곳에서 죽게되었습니다. 1623년 인조 반정이 후 다시 영창대군으로 복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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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왜 중전을 새로 간택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선조는 중중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3남이었습니다. 중종의 차남인 명종과 조카 사이이죠. 만약 명종이 아들이 있었다면 왕이 될 수 없는 존재없습니다. 따라서 선조는 적자가 필요했어요. 게다가 선조는 광해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궁 가운데 왕비로 간택해도 되지만 이 또한 여러 갈등 유발의 소지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즉 새롭게 왕비를 간택해서 대군을 낳으면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1살의 나이임에도 19살의 가임 적기의 인목대비를 계비를 들이고 곧바로 영창대군을 낳게됩니다. 그리고 어린 왕이 즉위하더라도 수렴청정할 대비가 존재하기 때문에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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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왜 인성군을 비호하려들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성군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숙부입니다. 인조는 인성군을 숙부라고 부르며 예우하였고,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성군이 3차례 역모와 연관되으나 인조는 그를 살리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를 존경해서입니다. 두번째로는 인성군은 반정에 동참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인조의 즉위를 반대하지도 않아 중립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인조 반정 이후 옥사에 대한 부담과 종친이 많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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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은 어떤 것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은 사람이 아니라 '소'를 위한 보험입니다. 1897년 6월 대조선보험회사라는 곳에서 처음 소보험을 발행되었어요. 소의 털 색깔과 뿔의 여부, 상태 등이 기록 되었고, 보험료는 소의 크기에 상관없이 1마리 당 엽전 한 냥이었다고 해요.소가 죽으면 보험금은 소의 크기에 따라 달리 지급되었는데, 큰 소는 100냥, 중간 크기의 소는 70냥, 작은 소는 40냥의 보험금이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보험은 여러 문제로 인해 100일만에 사라졌어요. 그리고 1909년 생명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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