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자 김석문이 주장한 지전설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석문(1658-1735)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우리나라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역학도해>를 저술하여 브라헤의 천체관을 소개하였습니다. 김석문은 태양의 둘레를 선회하는 별들이 모두 제각기 궤도를 따라 선회하고, 지구는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제자리에서 매일 1번씩 돌며, 1년에 366회 회전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그리고 그는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인류 역사와 문명 그리고 자연 현상까지도 흥망성쇠를 되풀이한다는 순환론적 역사 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근거로 하지·동지에 적도와 황도가 23.5°의 상거각도를 이루는데 그 각도는 때때로 달라진다는 점, 고비사막처럼 옛날에 바다였던 곳이 육지가 되기도 하고 지금 해안의 어느 곳은 해저로 가라앉고 있는 점, 지구의 각 지점마다 받는 태양의 광량(光量)이 달라 한서(寒暑)·흉풍(凶豊)·정치윤리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 등을 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역사관에서 탈피하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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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태우는곳에 제를 지내는 분들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달집 태우기'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달이 떠오를 때 짚과 솔가지를 쌓아올리고 불을 태우고 노는 세시풍속입니다. 달집 태우기는 액을 쫓고 복을 부르려고 하는 의미가 있어요.달집이 활활 잘 타오르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잘 타지 않거나 꺼져 버리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달집에는 대나무를 넣어 탈 때 나는 소리는 귀신을 쫒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달집 태우기를 하며 절을 하면 1년 내내 부스럼이 나지 않고, 여름철 무더위도 이겨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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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디아를 왜 인도라고 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디아를 인도로 표기하는 것은 외래어에 대한 한자의 가차 표기 방식 때문입니다. 가차 표기 방식은 음독, 훈독, 음가, 훈가 등의 방식이 있습니다. 질문의 '인디아'는 음독으로 과거부터 '印度(인도)'라고 적고, '인도'라고 읽었습니다. 인디아를 훈독으로 적으면 '天竺國(천축국)'로 표기하고 '천축국'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천축국'은 '인디아'와 뜻이 비슷하지만 발음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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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당이 태종묘호를 고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태종 무열왕의 묘호 '태종'의 당나라의 태종 문황제와 같은 묘호였습니다. 즉 당의 입장에서 신라가 당 태종의 묘호를 참칭하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당은 묘호를 고치라고 통보했습니다.하지만 무열왕이 김유신을 얻어 삼한을 통일한 공적이 있어 '태종' 묘호를 붙였다고 반발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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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행사에서 개행세를 한걸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사대부들한테 평판이 좋을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은 비록 안동 김씨 세도로 부터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했지만 직접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했던 정책에 대해 사대부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치체제 정비 및 개혁 대상자인 안동 김씨는 사실은 소외된 일반 사대부에게도 공감 사항이었습니다. 또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천주교 탄압 및 통상수교 거부 정책도 사대부들에게 공감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서원 철폐와 호포제 실시, 경복궁 중건에 대해서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1873년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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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원성왕은 왜 묘호를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성왕(재위 785-798)은 태종 무열왕과 함께 묘호가 있는 왕으로 알렸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라는 시호만 전합니다. 2015년 4월 430일 경상북도 경주의 승복사지 터에서 최치원의 대숭복사지비가 판독되었는데 그에게 '열조(烈祖)'라는 올린 것을 확인했습니다.그런데, 언제 원성왕을 열조라는 묘호를 올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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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유명한 화가로는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는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명성이 있었던 화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화가가 이녕(李寧)입니다. 그의 명성은 국내는 물론 송나라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는 송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예성강도'를 그려 올려 황제 휘종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실경산수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 아들 이광필도 그림을 잘 그려 명종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또한 공민왕도 그림에 실력이 있어 '천산대렵도', '이양도'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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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명절에는 데이트가 가능한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만 해도 남녀간의 연애가 자유로웠으나 성리학이 도입되고, 조선시대 유교 사회가 일반화되면서 '남녀칠세 부동석'이라 했듯이 남녀의 만남과 결혼은 중매와 정략 결혼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명절날에는 사회가 남녀의 해방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단오날에 그네를 타거나 답교놀이를 하며서 서로의 호감을 표현하고, 은밀하게 밤에 만나는데 춘향전에서 반영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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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자들의 보쌈문화는 어떻게 생겨난것이며 어떻게 행해진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과부 보쌈은 과부들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하면서 생긴 일종의 약탈혼이며, 독특한 재혼 풍습이라고 합니다. 보쌈은 합의하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강제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보쌈을 당한 여성은 보통 과부였지만, 처녀나 소박녀도 있었습니다. 보쌈을 하는 남성은 노총각이나 홀아비였으며, 보부상이나 양반집의 종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보쌈은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 행해진 풍속으로 관아에서도 어느정도 묵인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과부의 재혼이 허용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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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을 집필한 허균은 무슨 역모로 능지처참을 당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허균은 반역죄로 능지처참형을 받았습니다. 허균은 광해군 9년(1617) 대북파에 속하여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졌고, 오히려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허균과 기준격 사이에 고발과 탄핵 정국으로 돌변하게 됩니다.그런데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이 붙는 사건이 일어났고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붇였다는 것이 탄로났습니다. 허균과 기준격의 대질 신문 끝에 역적모의자로 몰려 고문과 심문을 거쳐 1618년 8월 24일 능지처참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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