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때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무엇인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성계는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태조 2년)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한양 천도의 배경은 풍수지리설에 따른 한양 명당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한양은 교통이 편리하여 전국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국가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한양은 사방에 산과 한강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개경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 의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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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아들이 쌍둥이였던 사례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쌍둥이 왕자는 매우 드뭅니다. 그런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하고, 자신의 쌍둥이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궁예의 폭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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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이 내쳐진 이유가 무엇인지?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숙번은 태조 이성계의 측근이고 이방원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1,2차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워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이 큰 것에 자만하고 다니면서 횡포를 많이 부렸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 14년 설을 맞아 상왕과 태종이 오는데 이숙번과 하륜이 국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 사간원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처벌을 반대하고 무례를 저질러 탄핵을 받았습니다. 결국 태종의 불신을 받아 권세를 잃고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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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왜 색목인을 우대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선 색목인은 금나라, 남송보다 몽골에 먼저 복속되어 몽골 제국의 확장과 안정에 도움을 주어 준지배층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절대 다수의 한족 견제의 필요성 때문에 색목인을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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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소나무가 왜 조선의 선비들에게 사랑받는 나무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며,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소나무는 인내, 불굴, 절개, 기개를 상징하여 선비들로 사랑받았습니다.이런 이유로 소나무는 군자의 품격을 상징하기 때문에 문인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졌습니다. 즉 매화,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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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는 3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랬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태어나며 부모님이 짓는 이름은 1) "휘(諱)"로 본명입니다. 휘는 매우 존중되어야 하는 이름으로, 부모, 임금, 스승이 아니면 쓰지 않았습니다. 2)"자(字)"는 성인이 되면서 받는 이름으로, 관례를 치르고 나면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3) "호(號)"는 스스로 지으며, 친구나 스승, 주위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이나 필명 등을 말합니다. 호는 본명이나 자 대신하여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어진 이름입니다.그리고 왕족이 경우에는 시호, 묘호, 존호와 같은 이름이 별도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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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감독과 연출이 따로 나오는데....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감독(Film Director)은 영화의 내부적인 창조적 요소를 담당합니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창조적 요소를 지휘하고, 연기 지도, 촬영, 편집 등 제작의 모든 과정에 깊잉 관여합니다. 연출은 감독의 역할을 포함하며, 연극이나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전체 공연을 지휘, 지도합니다. 좀더 격식 높은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연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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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대리 집권은 있었던 사실인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부왕 선조의 명에 따라 1606년에서 1608년까지 사망할 때까지 2년간 대리청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기며 대리청정 내내 불신으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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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의 피해는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25 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서 대략 24만 4천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양민 학살로 숨진 사람도 12만명이나 되고 실종자는 30만명에 이릅니다. 북한 지역은 28만명이 사망하였으며, 실종자는 79만명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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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나라에 금주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쌀로 술을 빚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쌀의 소비를 줄여 식량 사정을 악화하지 않도록 금주령을 내립니다.예를 들어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흉년이 들어 금주령이 처름 내려졌습니다. 특히 태종 때는 거의 매년 금주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금주령은 지방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준행되었으나, 서울의 사대부·관료사회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금주령을 지키지 않으면 엄격하게 처별했는데, 심한 경우 삭탈관직에 귀양까지 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금주령은 날로 엄하였으나 범하는 자는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과천에 술이 있다 하여 그 지방관을 귀양보냈고, 또 강화도의 선상(船商) 중에 범한 자가 있으므로 강화 유수를 파직하였으며, 지방관인 양천 현감을 귀양보내고… 또 영광(靈光)의 뱃사람이 경강(京江)에서 술을 마셨다 하여 영광 군수를 남쪽 연변(沿邊)에 귀양보냈다." (<영조실록> 40년)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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