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쪽에 옛날 조선시대 문인들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담양 청산, 무등산 안쪽 마을에 정철, 송순, 양산보 같은 유명한 문인들이 많은 이유는 조선시대 정치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의 낙향지였기 때문입니다. 정철 역시 아버지가 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 조부 선산이 있는 담양 창평으로 내려와 10년간 머물었습니다. 게다가 담양은 자연 지리적으로 영산강과 산지로 되어 잇어 은거에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즉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선비들이 세속 정치에서 벗어나 학문과 문학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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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의 변화가 조선 사회의 신분 구조와 정치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조선시대에서 관리는 철저하게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과거제에 따라 선발했습니다. 과거제의 운연 신분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조선 전기 과거는 가문에 관계없이 능력으로 관리에 진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중기 이후 인맥이 합격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으며, 특정 가문, 붕당의 자제들이 과거를 장악하는 경우가 커졌습니다. 그리고 과거는 소수 가문이 관직을 독점, 세습하는 수단이 됩니다. 또한 입시 경쟁이 치열해제면서 뇌물, 부정과 부패가 심화되어 갔습니다. 결국 과거는 신분을 고정하고, 부정 및 파벌 정치를 이끄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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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여왕들의 경우는 남편을 무엇이라 지칭했나요?
신라의 여왕들의 남편은 공식적으로 ‘국서(國壻)’ 라고 부릅니다. 나라의 사위, 즉 여왕의 남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신라에서 여왕이 남편은 기본적으로 골품제에 따라 성골, 진골에 해당합니다. 여왕의 남편인 국서는 궁안에서 상징적 존재로 궁정 행사에 참여하며, 귀족 일가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다만 진성여왕의 남편, 위홍은 각간 출신으로 여왕의 측근,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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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질 윤, 깃들일 서 이름 한자 뜻 풀이 부탁드립니다
빠질 윤(淪)의 기본 의미는 '빠지다', 또는 '떨어지다'입니다. 하지만 이름으로 사용할 때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몰두하다', '몰입' 등의 의미를 담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깃들일 서(棲)의 의미는 '새가 나무에 깃들다', '누군가 머무르다', '정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으로 해석하면 안정, 평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즉, '윤서'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깊이 빠져 살다', '깊이 몰입하여 살아가다'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깊이 몰두해 한 곳에 깃들처럼 지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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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공무원이란 어떻게 성장하여왔는가
경찰 공무원은 1945년 광복 이후 경무부가 되면서 각 도, 시에 경찰관서가 설치되고, 한국인 경찰공무원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정부 수립부터 1974년까지 내무부 산하 치안국이 중앙 경찰을 맡게 되었습니다. 1974년 유신 체제에서 치안본부가 권력, 정치 감시 기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1991년 이후 경찰청이 독립하고, 2021년에는 경찰법 전부 개정과 자치 경찰제로 하여 국가 수사본부와 지방 자치 경찰로 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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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광증이 있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도세자가 정신적 문제는 분명이 있었습니다.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에서 사도세자가 흥분, 분노로 내관, 궁인을 폭행 죽인 사례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미칠 듯이 속이 답답하고 미치겠습니다' 등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를 남긴것도 있습니다. 즉, 사도세자는 우울증, 조울증 등 전신 질환을 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약간 과장된 것이 있다고 일부 학자들의 비판이 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는 사도세자에 대한 문제가 커지자 '조정 안정과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해 왕세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봅니다. 영조는 폐세자로 강등한 뒤 임시격리에서 시작하였다가 사도세자가 통제 불능이라 판단하여 뒤주에 가둔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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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인조의 후궁인 조귀인은 병마절도사 조기의 서녀 출신으로 전열왕후를 모시던 궁녀였습니다. 그녀는 성품이 강하고, 영리하며 인조의 감정과 망설임을 잘 읽었습니다. 인조가 생애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궁, 효명옹주를 낳은 정치적 모체였습니다.하지만 그녀는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의 스파이, 왕조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끊임없이 모함하여 압박하였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감염과 질병이라 하지만 동시에 누명, 저주, 독살 의혹의 중심에 조귀인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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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일반 백성들 간에 이혼이라는 개념이 없었나요?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존재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 가운데 하나인 <대명률>에 따르면 철거지악, 의절 등을 이혼 규정으로 삼았습니다. 다만 양반가의 경우에는 국가 승인, 관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평민들은 훨씬 쉽게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백성 사이에 '사정파의'(부부가 서로 마주 앉아서 더 이상 못산다고 말하고 헤어지는 것), 그리고 '합의휴서'라는 단순 서술문으로만으로 이혼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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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독립 운동가 중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나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김구, 윤봉길, 안창호,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이름모를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어 우리민족이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예를 들어 동풍신 열사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처럼 만세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었으며, 고문과 옥중 투쟁을 견뎌냈습니다. 아화림 지사도 여성 독립 운동가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함께 추진하였습니다. 나석주는 의열단 단원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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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라비아 숫자는 본래 인도에서 발명된 숫자입니다. 아랍 상인들은 이를 편리하독 판단하여 널리 사용한 것이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유럽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이 사용하는 숫자라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 것입니다.현재 아랍권에서는 서양식 아라비아 숫자도 쓰지만 새롭게 디자인된 동아라비아 숫자를 쓰기도 합니다. 즉, 아랍권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는다는 오해는 일부 동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는 것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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