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라는 단어는 언제 누구로부터 만들어졌고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나요?
'폭염'이라는 단어는 언제 누가 만든것이 아니라 한자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폭(暴)'은 사나울, 햇볕에 말리다란 의미이고, '염(炎)'은 불탈, 불꽃이라는 의미로 두 글자라 합쳐지 지나치게 더운 기온을 의미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2008년 '폭염특보'를 도입하여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며, 2000년대 중반 부터 여름철 이상 고온 현상을 보도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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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험이 이제 3일 남았는데 정리가 안되네요
3일 밖에 남지 않았으면 압축적, 효율적으로 학습을 추천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연표를 활용한 흐름 위주로 정리하여 학습하도록 합니다. 사건 순서, 원인, 결과를 바탕으로 흐름을 잡도록 합니다. 다만 연도를 외우기보다는 어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출문제를 충분히 활용하도록 합니다. 과거 기출문제를 풀면서 자주 나오는 것을 별도의 메모를 통해 정리하며 풀어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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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혁명은 인류에게 안정적인 번영을 가져다준 축복으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불평등을 심화된 불행일까요?
농업혁명은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는 역할을 했습니다. 식량을 한 곳에서 모을 수 있게 되어 기근 위험을 줄이고 정착 생활을 가능해졌습니다. 또한 인구가 늘면서 도시, 국가와 문명이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잉여 생산이 생기면서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는 빈부 격차를 일으켜 계급과 계층, 그리고 권력 구조가 생기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또한 평균 농부는 수렵 채집인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했으며, 이는 오히려 건강과 영양 상태를 나빠지게 만드는 원인되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없어도 될 것들, 예를 들어 세금, 전쟁, 침략 등과 질병이 정착 사회 특유의 문제로 등장한 것입니다. 즉, 농업 혁명은 인류 전체의 풍요와 번영을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불평등과 고통도 함께 늘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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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당나라는 어떤 관계였다 할 수 있나요?
백제와 당나라는 초기에는 우호적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나당 동맹 체결 이후에는 적대적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백제는 한동안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협력적이었습니다. 특히 7세기 중반 백제는 당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자왕 3년(643) <삼국사기>에는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에 조공하러 가는 길이 막혔다'며 군사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었고 648년 나당 동맹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당과 단절되었습니다. 즉,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협력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나당 동맹으로 적대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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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중에서 가장 오래집권한 임금은 누구입니까?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왕은 영조입니다. 그는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1년 7개월 동안 국왕으로 재위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숙종, 고종, 선조 순입니다.우선 영조가 가장 오랫동안 재위할 수 있었더 것은 장수입니다. 그는 83세까지 생존하여 재위기간도 긴 것입니다. 그의 장수 비결은 검소한 식사와 절제된 생활과 잦은 진료 기록으로 병을 예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탕평책으로 붕당을 조정하여 재위 기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외환 보다 내부 정치에 집중하여 장기 집권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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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촉오 구조가 통일로 가게 한 계기가 된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요?
위촉오의 삼국을 통일한 결정타는 279년 서진의 오나라 정벌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사마씨가 위나라 권력을 장악한 뒤 벌어진 서진 통일 전쟁입니다. 쉽게 말하면 촉나라는 제갈량 사후 약해졌고, 위나라는 결국 사마씨가 권력을 빼앗아 서진으로 새로운 나라를 바꾸면서 통일의 기반 마련되었습니다. 서진은 20만 대군을 편성하여 여러 갈래로 나누어 오나라를 공격했습니다. 한쪽은 서주에서 건업, 다른쪽은 형주로, 또 하나는 익주로 장강을 따라 내려 오며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오나라 장수들이 곳곳에서 패하고 수도 건업이 포위대자 손호가 280년에 항복하게 됩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의 계기 전쟁으로 하나만 선택하라면 보통의 서진의 오나라 정벌전이라 봐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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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서 왕 이름은 어떻게 짓는거예요?
왕의 이름은 휘, 묘호, 시호 등으로 구분합니다. 휘는 왕이 태어나기 전이나 즉위전에 정해지는 본래 이름입니다. 조선 왕실은 피휘 원칙에 따라 백성들이 왕의 이름과 겹치지 않도록 외자, 그리고 사용하지 않는 글자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글고 묘효와 시호는 왕의 사후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묘호는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이름으로 생전의 왕의 업적을 바탕으로 왕조 개창, 국난 극복 등의 업적을 이룬 왕은 '조', 나라를 잘 이어간 덕이 큰 왕은 '종'을 붙입니다. 즉 조는 창업과 중흥, 종은 계승, 수성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시호는 왕의 생전 업적과 덕을 평가해 붙이는 긴 이름입니다. 여러 관료들이 논의하여 정하고 왕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습니다. 따라서 묘호나 시호는 왕의 업적, 성격, 정치적 평가를 반영하였기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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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붕당정치는 왜 발생했고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조선시대 붕당 정치의 시작은 선조때부터 시작됩니다. 사화로 어려움을 겪은 사림들이 향촌에서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선조 이후 대거 중앙 진출했는데, 제한된 정치, 경제적 패권을 놓고 분화된 것입니다.특히 사림들은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과 이조전랑 인사를 놓고 기성 사림인 심의겸과 신진 사림 김효원을 중심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여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파와 정파적 성격을 달리하여 분화를 촉진하였습니다.본래 붕당은 상대 세력을 인정하고 공존 체제를 바탕으로 공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공론보다는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파 싸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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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왜 만주에 세워졌나요?
신흥무관학교가 만주에 만들어진 이유는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관련됩니다.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신민회는 서간도 삼원보를 건설하여 독립 운동 기지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회영, 이상룡 등 신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대거 집단 망명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입니다.특히 삼원보는 바로 압록강 건너에 있어 국내 청년들이 모이기 쉽고,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여 전략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도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 삼원보에서 한인들은 경학상 등 한인 자치 단체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흥 강습소는 신흥중학교, 그리고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즉, 신흥무관학교가 만주에 세워진 이유는 국내에서의 일제 탄압 회피, 지리적·전략적 이점, 독립군 기지 건설의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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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은 왜 전국민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일본은 1300만원의 차관을 빌미로 우리나라를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즉, 일본은 러일 전쟁 직후부터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며 재정적으로 옭아매기 위한 차관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존망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구에서 서상돈을 중심으로 국채 보상 운동을 통해 일본의 경제적 예속화를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내어 차관을 갚고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언론 기관이 앞장서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신문들은 의연금 납부자 명단과 금액을 보도하여 운동의 확산을 독려했습니다. 이러한 호소는 민중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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