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대해 기록해둔 다른 나라에서 집필한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나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 기술한 역사서도 분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부터 <청사고>까지 2000년 동안의 중국의 역사서를 통해서도 고조선서부터 조선 시대까지 역사를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입장과 시각으로 기록한 측면에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일본에서도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의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 고대사와 한일 관계사 관련 기록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외 에도 하멜의 <하멜 표류기>, 뒤 알드의 <조선전>, 존 로스의 <한국사>, 윌리엄 엘리엇의 <한국, 은둔의 나라>, 헐버트의 <한국사> 등을 통해서도 조선과 한국 근대사를 엿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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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무력도, 지력도 압도적으로 높다고 평가받지는 못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위나라의 수장이 될 수 있었나요?
조조가 위나라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인재 등용 정책과 실용주의 리더십, 그리고 난세를 보는 정치, 군사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신분, 도덕성 과거 행적을 불만하고, 오직 재능만 있으면 등용했다고 합니다. 특히 3차례나 구한령을 발표하여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순욱, 가후, 장료, 곽가, 서황 등을 등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조는 법치주의 따라 신상필벌이 엄격하였으며, 사치와 부패를 엄격하게 단속했습니다. 이는 조직의 신뢰를 확보하였으며, 인재를 올바른 자리에 배치하는 역량을 극대화하였습니다.그리고 조조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전략가, 행정가, 시인으로서 종합적 능력을 갖춘 리더였습니다. 황건적 토벌과 북방 통일, 그리고 토지 및 군사 게혁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여준 것입니다. 유비가 '인덕'으로 사람을 끌어들였다면, 조조는 '공정한 능력 평가'로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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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정권이 발생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은 무엇인가요?
1170년 무신 정변이 일어난 배경은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 사회에 따라 무신들의 차별입니다. 고려는 군사 지휘권조차 문신이 장악했는데, 국방을 논의하는 도병마사에도 정3품인 상장군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무신은 단순한 지휘관 역할에 그쳤으며, 국왕과 행사의 호위 역할만 해야 했습니다. 과거에서도 문과는 있었으나 무과는 출세의 길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문벌 귀족들은 음서 제도와 공음전으로 대대로 관직과 토지를 세습하여 부를 축적했지만 무신들은 전쟁에서 공로가 있어도 토지 분배에서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급 군인들도 문신 귀족이 토지를 독점하면서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노역에 동원당해야 했습니다.1120년 이자겸의 난, 1135난 묘청의 난 등 문벌 귀족 사회의 동요가 있었으나 의종은 개혁은 하지 않고 오로지 향락에 빠져 무신들을 불만을 심화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1170년 의종의 보현원 나드리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문벌 귀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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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시대에 유행하는 복장이란 게 잇엇을까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패션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신분과 예법에 맞는 유행하는 복장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따라 복장도 '예'를 갖추는 것이 중시했습니다. 따라서 옷의 색, 소재, 문양, 장신구까지 신분에 따라 예법으로 규정에 따랐습니다. 남자의 기본 복식은 저고리와 바지,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입니다. 그리고 신분에 따라 양반은 고급 비단, 넓은 소매, 높은 모자로 권위를 강조하고, 서민은 무명과 흰색 옷이 주류였습니다.패선 트랜드로 볼 수 있는 사례로는 여성의 저고리의 변화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저고리가 비교적 길고 품이 넉넉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짧아졌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상류층은 가체를 크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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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제가 추석명절이 지났는데 추석 명절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 는지가 알고 싶어서 질문을드립니다.
추석의 기원은 <삼국사기>의 신라 유리왕 9년(32년)에 도성의 부녀자들을 두편으로 나누어 7월 16일부터 한달 동안 길쌈 대회를 연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진팀이 이긴팀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하는데, 이를 신라에서는 '가배'로 부른 것입니다. 가운데라는 의미의 '가배'가 이후 '가위가 되었으며, 이후 '크다라는 의미의 '한'과 결합되어 '한가위'가 된 것입니다.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는 4대명절로 자리잡았습니다. 추석에는 넘어 가을의 풍요를 기뻐하고, 햇곡식으로 조상에게 감사하며, 가족과 이웃이 함께 즐기는 명절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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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상 한국 고유의 영토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주장하고, 자신의 영토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17세기 일본이 이용했다는 주장이고,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40호에 따라 무주지를 시마네현 오키도 소관으로 편입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일본은 1951년 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할 영토로 제주도·거문도·울릉도는 명시되었지만 독도는 빠졌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따라서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전후 한국의 실효 지배를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주장은 메이지 정부 당시 1877년 태정관 지령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고 명시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41호에서 석도, 즉 독도를 울도군 관할로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따른 편입은 국가적 차원도 아니고, 러일 전쟁중에 불법 강탈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독도가 명시하지 않다고 해서 일본 영토라고 확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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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의 약속을 지키던 사육신은 어디에 묻혀 잇으며 그와 반대로 배신한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앗나여?
사육신은 문종과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선 신하들을 말합니다.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말하며,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하자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자결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박팽년은 옥중에서 사망, 유성원은 자결, 그리고 4명은 군기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의 묘는 노량진에 사육신 공원과 가묘가 있습니다. 반면, 세조를 도운 사람들은 정난공신, 좌익공신이 되어 관직과 토지, 재산을 받았습니다.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권람도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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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국경일이 많이 있습니다. 개천절, 광복절, 한글날 등
8월 29일은 경술국치로 1910년 8월 22일 일본과 대한제국 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된 날입니다. 즉, 국치일은 8월 29일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은 대등한 의미의 합의처럼 '한일합방'이나 '한일합병'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탈한 사건입니다. 이날은 기념하거나 축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나라를 잃은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는 국권을 빼앗지 않겠다는 의지와 교훈의 의미입니다. 광복 직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기념일로 하였지만 현재는 법정 공휴일이나 기념일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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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무슨 욕심이 잇어 왕권을 찬탈햇을까여?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유는 욕심만 아니라 신하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한 불만, 왕실을 지키려는 명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인,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이 국정을 장악하자 수양대군은 이를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자신이 왕실의 중심이 되어 정국을 바로잡고자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단순한 보좌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그 뒤 수양대군은 왕실의 안정을 명분으로 단종을 압박하여 1455년 양위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단종 복위 시도를 이유로 사육신을 처형하고 결국 1457년 단종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즉, 세조는 왕권 강화라는 명분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고, 이후 무력과 역모를 통해 단종에게 왕위를 찬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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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공회는 왜 루이16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나요?
국민공회가 루이 16세의 처형을 결정한 이유는 공화정 선포로 인해 루이 16세가 더 이상 왕이 아니라 혁명을 무너뜨리려 한 반역자로 판단한 것이며, 반혁명 세력의 결집 불씨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1791년 루일 16세의 국외 도피 시도인 바렌 사건 이후 왕이 헌법과 혁명을 수용할 생각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외국과 내통하여 혁명 정부를 공격하려는 의심을 샀습니다. 또한 왕이 반혁명 세력과 연결하여 혁명을 방해하려는 불신이 컸습니다. 1792년 9월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루이 16세는 ‘신성한 왕’이 아니라 시민 루이 카페라는 개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혁명 재판소는 거의 만장일치로 유죄로 결정하고, 사형 여부는 치열한 표결 끝에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어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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