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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에는 당시 작전의 내용까지 담겨지 있는지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단순히 감정적 기록에 그치지 않고 당시 전쟁과 전략, 작전, 군사 관리 등을 포함하여 기록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7년간의 임진왜란 당시에 쓴 진중일기로 전쟁 중 날씨 변화, 군무 상황, 전략과 전술 계획, 군수 및 병참 문제, 부하와 장수들에 대한 상벌, 부하들의 건강과 인물 평가 등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동시에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면모와 심경도 함께 담겨진 복합적 성격의 기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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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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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인과 중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조선시대는 법제적으로 양천제도입니다. 즉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합니다. 양인은 자유민을 통칭하며, 양반과 중인, 상민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양반의 지배질서가 강화되면서 중인과 상민의 신분이 고정화되면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하는 반상제가 일반되었습니다.따라서 중인은 양인에 포함되지만 중간 지배층으로 구성된 신분입니다. 이들은 의관, 역관 등의 기술관을 중심으로 서리, 향리, 남반까지 포함하며, 넓게는 서얼까지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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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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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은 조선을 정말 길로만 쓰려했나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정명가도"라는 명분을 내세워 침략했습니다. 사실상 일본의 공식 외교 명분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점령 및 지배를 염두하여 둔 것입니다.이는 외교적 포장에 불과하였으며, 실제 교섭 과정에서 조선의 8도 가운데 일부를 할양하고, 왕자의 인질을 요구하는 등 명박한 조선 점령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궁극적으로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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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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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인돌 아래는 유물이 많이 묻혀 있나요?
우리나라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입니다. 고인돌 아래에는 주로 매장 시설과 껴묻거리가 묻혀 있습니다. 출토되는 윰로른 돌칼, 돌화살촉, 돌도끼, 토기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탁자식(북방식) 고인들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도굴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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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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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는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점자는 프랑스의 루이 브라유가 1824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루이 바라유는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며, 당시 군 장교엿던 샤를 바르비에가 만든 야간 문자라는 군사용 점자를 개량하여 손가락으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점자로 체계화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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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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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네요..
서울시기 종묘 앞에 140미터 고층 빌딩 건립을 허가한다고 합니다. 서울시와 시의회는 관련 조례를 삭제하면서 무리하게 추진하려 하는 모습입니다.서울시는 문화재와 시민의 삶이 공존하는 개발 환경을 조성한다고 한지만 사업 추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는 조치로 여겨집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유산 주변 경관을 해칠 수 있는 고층 건물 허가가 없다는 점"을 보장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가 유산청은 세계 유산 등재 취소 가능성을 엄중하게 제기하고 필요시 법적 조치를 예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는 국내외 신뢰 상실과 문화 유산 보존 가치 훼손의 심각한 우려 사안이라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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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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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에 전쟁에서 구소련하고 대응할수있는 나라는 어느나라였는지 알고싶어요
냉전 시대라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유진영의 대립을 말합니다. 당시 소련과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서독, 영국, 프랑스 등은 NATO를 결성하여 공산권과 그 동맹국에 맞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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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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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의 부민고소금지법이 시행된 이유가 뭔가요?
부민고소금지법은 조선 세종 당시 허조가 건의한 것으로 일반 백성, 하급 관리가 지방 수령을 상대로 상급 관리에게 고소하는 것을 금지한 제도입니다. 그 목적은 수령의 권위를 보호하고 수령이 소신껏 행정을 하도록 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수단입니다.하지만 이는 백성들의 권리를 제약하고, 수령의 권력 남용을 조장하는 것이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사회적 필요에서 비롯된 법으로, 백성의 고통보다는 국가 체제 안정과 권위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법령으로 채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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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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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요?
연개소문은 조부와 부친은 대를 이어 고구려 최고 관직인 막리지를 역임하였지만 따라서 연개소문 역시 막리지에 진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왕과 귀족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으며, 특히 영류왕은 중국의 수를 대신한 당과 우호적인 외교를 바라면서 강경 외교론을 주장하는 연개소문과 충돌하였습니다.왕과 대신들은 군사령관 지위인 동부대인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이를 미리 알야채리고 642년 군사 사열식을 열어 반대파와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보쟝왕을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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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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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근 전 사령관의 충격적인 폭로가 있었네요..
곽종근 전 육군 특전사령군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2024년 국군의 날 행사 이후 윤 전대통령이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대표를 "잡아와라, 총으로 쏴서라도 죽이겠다"라고 말했다고 폭로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향후 재판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12.3 내란 당시 일어난 여러 정황과 진실이 속히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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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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