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서 역사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김구 선생의 체격이 매우 큰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선생의 키는 보통 180cm 안팎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진에서도 주변 인물보다 훨씬 크게 보이고 당시 평균 키가 지금보다 훨씬 작더라고 하더라도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체격이 컸습니다. 비록 190cm 이상의 초거구는 아니더라도 당시대의 평균 체격에 비해 매우 컸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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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 전쟁의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이유와 근거 포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는 미소 냉전, 그리고 1990년 냉전이 붕괴된 이후에는 미국이 세계 질서의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미국과 대결하는 패권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도 동맹망과 국제 제도 장악력이 큽니다. 미국은 군사력 자체뿐만 아니라 동맹과 국제 규범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구조가 강합니다. 또한 기술 상태계도 미국이 아직은 앞섭니다. 게다가 여전히 세계는 경제적으로 달러 패권이 큽니다.그런데, 중국은 생산 규모와 산업 기반이 매우 커서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은 권위주의적 국가로 국가 주도 전략이 빠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패권국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다만 미국 중심 질서와 중국 중심의 영향권이 분리, 병존하거나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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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이랑 통영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이순신 장군은 통영 출신은 아니며,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충남 아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통영의 옛 이름인 충무는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을 따서 만든 도시명입니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즉, 이순신 장군이 통영 출신이어서 지명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통제영의 근거지이기 때문에 나중에 통영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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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사람들은 날짜를 어떻게 알고 구분했는지 궁금해요.
조선시대 날짜 개념은 상당히 체계적이었습니다. 조선은 해와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든 책력을 사용했습니다. 조선은 천문, 역법, 기상, 시간을 측정을 맡은 관청인 관상감을 운영했습니다. 특히 조선 세종 시기 만든 칠정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으로 해와 달, 다섯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해 절기, 일식, 월식, 날짜와 시간을 정햇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왕은 새해에 책력을 내려주면 관청과 마을이 이 것을 기준으로 정월 초하루, 설날, 제사일, 농사일을 맞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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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종교 갈등은 왜 반복적으로 발생해왔을까요?
역사적으로 종교 갈등이 반복된 이유는 신념 차이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제가 종교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정자들은 종교를 활용합니다. 특히 고대 국가일 수록 신정정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신성시하여 백성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 것입니다. 정치, 영토, 경제 갈등을 종교가 덮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전쟁 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세속 권력, 세금, 토지 등의 문제가 핵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리 해석에서도 갈등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이파, 크리스트교의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 등의 갈등이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져 충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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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종교가 국가 권력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요?
종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사례는 많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스스로 신으로 여겨져 왕권과 종교와 결합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등의 문명도 신의 대리자로서 신정정치를 시행했습니다. 또한 중세 유럽 시기에 교황은 왕보다 우위에 서려 했으며, 서임권을 놓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와 대립하였습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는 무함마드, 그리고 그를 이은 칼리프는 정교 일치의 지도자로 역설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영향력은 권력의 정당화, 법과 제도 형성, 전재오가 외교, 사회 통제 등영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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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종교들이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서로 다른 종교에 비슷한 윤리와 가르침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공통된 고민이 종교에 투영된 결과입니다. 삶과 죽음, 고통, 가족 공동체, 정의 같은 문제에 종교적으로 비슷한 답을 내놓기 쉽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윤리보다 상위의 규범으로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심리적 구조도 죄책감, 두려움, 희망, 구성 욕구 등의 감정은 윤리를 닯게 만듭니다. 그리고 문화적 교류도 각 종교에 반영되어서도 그렇습니다.즉, 비록 서로 다른 종교지만 비슷한 교리를 갖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비슷한 윤리와 가치가 자연스럽게 생기고, 문화적 교류의 영향이라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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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이 어린 시절 동학교도로 알고 있는데, 어떤 활약을 했나요?
청년 시절 김구 선생은 애개 접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 동학에 입도하여 포교 활동에 열심였습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쪽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하는데 참여했습니다. 다만 나이가 어리고 군사 경험이 부족해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 앞에서 물러났습니다.즉, 어린 김구는 동학 사상에 깊이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과 농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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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을 주도한 일본 낭인들이 일본으로 귀국 이후 어떤 처벌를 받았나요?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은 사실은 한국 침략을 위한 스파이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체포되어 추방되었으나 대부분 처벌되지 않았고, 오히려 무죄로 풀려나거나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그들 가운데, 시바 시로는 귀국 후 정치 소설가,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미우라 고로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다치 겐조는 체신대신 등의 요직을 맡았으며, 기쿠치 겐조는 언론계로 복귀하여 활동을 지속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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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혁명당에 합류하였던 지청천, 조소앙 등 민족주의 세력이 이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민족혁명당은 1935년 김원봉의 의열단 주도로 난징에서 조직된 민족 유일당 조직입니다. 하지만 민족혁명당 결성된 뒤 김원봉의 의열단계가 당권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다른 계열들이 불만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독립 운동 방략의 차이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민족혁명당 안에서 무장 투쟁 중심, 연합 전선 중심, 임시정부 지향 등 내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따라서 1935년 9월 무렵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지청천 등이 이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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