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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반정의 구실은 "폐모살제"와 중립외교에 따른 명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특히 인목대비를 폐위라고 영창대군을 죽인 시실이 가장 큰 허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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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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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발전한 것은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보필하으며, 1442년(세종 24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음력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 후반기의 업적은 사실 문종의 업적입니다.문종은 세자 시절 진법을 정리하고, <동국병감>을 편찬할 정도로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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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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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군은 고조선의 제1대 왕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2년까지이며, 단군왕검·단웅천왕이라고도 합니다. 단군은 1908세에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 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즉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장으로 제정일치의 고조선의 통치자를 이르는 명칭이 우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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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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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업적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효종(재위 1649~1659)은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인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병자호란 후 형 소현세자와 청에 볼모로 가 있다가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돌아와 세자로 책봉되고 인조 사후 즉위하였습니다.효종은 송시열 등 대청 강경파를 중용해 은밀하게 북벌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북벌을 위해 어영청을 창설하고, 금군을 기병화 하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 방어를 위해 수어청을 재강화하였습니다. 또한 화포 개량, 군사훈련 강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청의 요청에서 의해 두 차례의 나선정벌을 단행했습니다. 김육의 건의를 받아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했고 전세개혁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으며,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켰고 역법을 개정해 시헌력을 도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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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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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간토대지진은 어떤재앙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진도 7.9의 진이 일본 중심지 도쿄와 관동 일대를 강타하였습니다. 관동 대지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후 근대사회로 진입하여 맞이한 최대의 재난이었습니다 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도쿄 일대가 잿더미로 변하는 등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일본은 수도 도쿄 부근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사회 혼란과 정부에 대한 반감을 방지하기 위해 불만의 화살을 조선인에게 돌렸습니다. 일본 당국과 언론은 ‘조선인이 방화했으며,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을 살해한다.’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대지진으로 생긴 사회 불안을 한국인 탓으로 돌려 적대감을 조장하였습니다. 곳곳에서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사냥이 벌어졌으며,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적어도 6,000명 이상의 재일 한국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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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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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때 일어난 임술민란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2년에는 임술 농민 봉기는 단성 농민 봉기와 진주 농민 봉기를 거치면서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임술 농민 봉기) 특히 진주 농민 봉기는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환곡을 부정하게 운영하자 몰락 농민 유계춘 등이 주도하여 진주목과 병영을 공격하였습니다. 임술 농민 봉기는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이 과도한 수탈로 인한 삼정의 문란이 주된 원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봉기가 지역별로 전개되어 주변 지역과 연대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정부는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농민 봉기의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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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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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현종을 황제로 세운 강조란 장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강조는 황해도 신천 호족 출신의 고려시대 무신입니다. 그는 성종 때 궁료로 천거된 이후 991년 무관을 본격 출시하였습니다. 목종 당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 시기에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습니다. 목종이 후계자 대량원군 순을 후계자를 선정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게 하고자 강조를 수도로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로 돌아가던 중 목종이 위독한 틈을 타 김치양 등이 나라를 탈취했다는 풍문을 돌자 다시 개경으로 진군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강조는 1009년 이부상서참지정사가 되어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거란이 1010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로 쳐들어 오자 30만 군사로 맞서지만 패배하고 사로잡힙니다. 성종은 강조의 변절을 권유하나 거절하여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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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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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 호미곶 아마도 작은 포구를 곶이라하는게 맞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육지에서 바다로 비교적 뾰족한 모양으로 돌출된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을 일컫는 반도(半島)와 비슷하나 반도는 좀 더 큰 규모의 땅을 가리키며, 곶은 그보다는 소규모의 땅을 의미합니다. 곶은 반도의 말단부에 같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북한 황해도의 장연반도 말단부를 장산곶,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반도 말단부에 있는 호미곶이 그 예입니다. 갑(岬) 또는 단(端)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단(端)은 주로 북한에서 사용됩니다. 북한 함경북도의 어랑단과 그보다 약간 남쪽에 있는 무수단, 강원 통천군 금강산 주변의 수원단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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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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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 사망자는 총 몇명 정도나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3권 자료에 따르면 전사한 한국군은 137,899명, 부상자는 450,742명, 실종까지 포함하면 한국국 피해자 수는 약 621,479명에 달합니다.6.25 전쟁 중 한국 땅에서 목숨을 잃은 유엔군 사망자는 40,670명, 부상자는104,280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154,881여 명이 6.25전쟁으로 인해 부상.실종.전사됐습니다.북한군은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 따르면 북한군의 인명피해는 미군자료 기준 522,000명 사망, 실종 및 포로 102,000명, 비 전투손실 177,000명으로 총 801,000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알려습니다. 한국이 추정하는 중공군 인명 피해는 사망자는148,600명, 부상자 798,400명, 실종자와 포로, 비 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972,600여 명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됐다고 보입니다.그리고 한국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당시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명, 실종자 79만 6천명으로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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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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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란 인물이 궁금합니다. 결국 거란을 이겼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은 강조의 변을 핑개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략(1010)합니다.그러나 거란의 진짜 의도는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강조는 30만 고려군을 이끌고 항전하다 패배했으나 투항을 거부하다 죽게됩니다.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갑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후방 공격에 취약하고, 병참이 차단되어 장기전에서는 약점이 노출될 수 있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결국 거란은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갑니다.결국 겉으로는 항복했으나 고려는 거란의 퇴로 도중 양규와 김숙흥(金叔興)이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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